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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깨어나기 – 문계성 수필가

사람들은 천상(天上)을 꿈꾼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했고, 기독교인은 천국에 가고자 했다. 인도인들은 브라만과 합일하고자 했다. 이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세상은, 지금 보이고, 만질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이 현실을 부정하는 관념이 만들었다.
지금 당신이 숨 쉬고 사랑하고 번민하는 이 현실은 불완전하여 괴롭고, 저쪽의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세상은 완전하여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은, 사람들을 많은 생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 속에서 많은 관념의 세상을 창조했다.
저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완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매우 조직적으로 가르쳐지고, 강제되기도 했다. 중세의 기독교 역사나,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투쟁, 그리고 이 모순이 가득한 현실을 전부 부수어 버리고 새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외치는 공산주의의 투쟁이 이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저 옛날 유대 사회는, 그들의 하나님을 성소에 모시고, 그 하나님 앞에서 죄의 사함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이 하나님의 성소 앞에 나아가 그 이름을 호명 당하지 않으면 죄는 씼기지 않고, 그래서 저쪽 완전한 세상인 천국으로 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천국은 영원한 실재의 세상이고 현실은 한갓 고통스런 꿈을 꾸는 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구원(救援)의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왜 천국을 그렇게 믿었을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저 보이지 않는 곳에 천국이 있다 그곳은 죄가 사하여져야 갈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이런 천국을 가르쳤을까? 누가 그곳에 가자고 선동했을까? 그 선동자들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은 죽어서 천국을 다녀와 다시 깨어난 사람들이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고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것을 믿고, 또 누군가를 가르친다. 환상(幻想)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죄가 사해져야 갈 수 있다고 가르쳐진 천국을, 예수라는 젊은 각자(覺者)는 “지금 네 마음 속에 있다”고 다르게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고발당해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들은 왜 예수를 그렇게 죽였을까? 사람들을 계속하여 환상(幻想)에 가두어 두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환상이 깨지면, 그들이 환상으로 만들어 놓은 질서가 깨지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말한,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 역시 진리가 되어 가르쳐졌다. 이 현실은 불완전하고 저 이데아의 세계만이 완전하다는 가르침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였을까! 그들은 현실이 불만스러울 때마다 저 세상을 동경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을 것이다.
인도인들조차도 현실은 환상이며, 저 지각(知覺)이 불가능한 브라만만이 실재하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흰두교인들은 짐승의 피를 제물을 바치며 완전한 존재에로의 귀환을 희망했다.
그렇다면, 천국과 이데아와 브라만만이 실재라면, 이 현실은 무엇일까? 지금 보고 만지고 사랑하고 번민하는 이 현실이 어떻게 실재가 아닌 가상(假像)일 수 있을까?
2500년 전, 번민하던 젊은 구도자 시타르타는 중도(中道)의 깨달음을 천명했다. “지금 이 현상(現像)이 곧 브라만이다. 브라만은 현상으로 작용한다.”
현대 양자물리학은 이 각자의 말에 동의하는 대답을 하고 있다. 환상을 낳는 의혹은 진실의 발견에서 사라진다.
이 현실은 거짓이여, 완전한 세상은 별도로 존재한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을 동요케 할 수 있고, 선동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지금, 이곳을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쪽에 영원하고 지복한 세상이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말하므로, 현재는 늘 부정당하고, 미래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현실을 지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 완전한 세상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실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인류는 비인간적 차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도 해보고, 수천만 명을 죽여가며 공산주의 실험도 해보았고, 전쟁을 해가며 제3 제국의 건설을 실험하기도 했다.
인류는 경험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아마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성찰을 동반하지 않은 욕망의 분출에 불과했다. 핵무기의 끔찍함을 경험했으면서도 핵무장 경쟁을 하고, 공산주의 이념의 실패를 알면서도 독단적 권력의 향유하는 공산체제의 유지를 꾀한다. 정치인들은 권력 투쟁으로 날을 샌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거기에 당도하면, 저것을 하면 당신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환상이다. 그들은 당신을 묶어둘 새로운 환상을 계속 만들어 갈 것이다.
권력이 일부 사람들에게 전유되는 것을 막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은, 더욱 강한 권력 소수(小數) 독점의 체계를 만든다. 그들은 ‘지금 여기’는 여전히 지옥이므로 “더 완전하기 위하여 이것이 필요하다!”며 선동할 것이다.
인류가 역사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환상에 가두어 두고 지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오해진 방법, 그런 악의(惡意)뿐일까?.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만족시켜 줄 어떤 것을 찾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들은 음식을 공짜로 배급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을 것이고, 영혼의 안식을 찾는 사람은 천국을 분명하게 약속하는 어떤 종교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러나 음식을 순수하게 공짜로 배급하는 세상은 환상(幻想)이다. 사람들이 예수처럼 사념(思念)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는 기적적 존재로 바뀌지 않는 한 그런 세상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지나친 갈망 때문에 정치와 종교 집단은 여전히 환상으로 우리를 붙잡아 두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이 환상은 하도 오래 내재(內在) 되고 교육된 것이어서 자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환상이라고 말하는 순간 기존 지식과 질서로부터 무서운 공격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환상에 갇혀 지내게 된다,
진정한 세상은 저곳에 있지 않다. 이곳이 완전하다는, 이 자리가 꽃자리라는 자각에 있다. 이 새봄에, 저 거칠고 뚜꺼운 껍질을 뚫고 눈부시게 피어나는 매화꽃처럼, 우리의 이식이 깨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