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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해를 고향 땅에 모시자! – 안병국 교수

일해(日海) 전두환 전 대통령께서 서거한 지가 5개월여가 되어간다.
<예기〉 ‘제의’에 “뭇 생령은 반드시 죽나니,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衆生必死, 死必歸土)”고 하였다. 1백여일이 되도록 아직 귀의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이 일은 정상이 아니다. 달을 넘겨 하는 유가(儒家)의 상례 기간을 적용하여 애써 자위하려 하나, 전 대통령의 경우는 오히려 해를 넘긴 유년장(踰年葬)이 되고 있으니, 동서양 매장사에 그 예가 흔하지 않다. ‘유월장(踰月葬)’은 본디 중국의 한당(漢唐) 시대에 선비의 장례를 그렇게 하자고 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 합천인들에게는 너무 익숙하다. 왜냐하면 초계 추연 권용현 선생의 장례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에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궤(儀軌)에 기록된 고종황제의 장례는 발인하기까지 40여 일이었다. 특히 예를 존중한 중국 북송 때에도 황제는 사후 7개월 내에 반드시 안장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태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예기>에서는 “천자는 7일이 지나 빈을 하고 7개월이 지나 장사를 치르고, 제후는 5일이 지나 빈하고 5개월이 지나 장사하며, 대부 사서인은 3일이 지나 빈을 하고 3개월이 지나 장사를 지낸다(天子七日而殯 七月而葬, 諸侯五日而殯 五月而葬, 大夫士庶人三日而殯 三月而葬.)”고 신분에 따라 장기의 차이를 두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1417년 6월 1일 조에 보면 “옛날에는 천자는 7개월, 제후는 5개월, 대부는 3개월, 사는 달을 넘겨 장사지냈는데, 이제는 간혹 해를 넘겨도 장사 지내지 않는 자가 있으니, 심히 옛 제도에 어긋난다(古者天子七月, 諸侯五月, 大夫三月, 士踰月而葬, 今或有踰年未葬者, 甚乖古制.).”라는 구절도 있다.
연희동 자택에다 안치해 둔다면 그것이 임시라고 해도 괴기스럽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쉽지 않다. 유명(幽明)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논어> ‘자한’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공자가 자신의 장례를 두고 한 이야기다. “내가 가신의 손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자네들 손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 내가 큰 장례는 치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설마 길거리에서 죽겠느냐(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 且予縱不得大葬, 予死於道路乎.)”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이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그러나 이 어진 영가는 머리 하나 누일 곳이 없다.
저 적중 안모는 일해의 장지를 두고 이견이 많을 거라 보고, 그럴바엔 차라리 고향땅에 모시자고 주장했던 터였다. 그러나 향우님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국가장이니 국장이니 현충원이니 전방의 야산이니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절차와 의례를 권력자에게 맡기느니, 나라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평범한 내 고향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우리 고향 땅’에 만년 유택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묘역은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그 구성원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념과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특권적인 장소다. 단순히 죽은 자들의 매장터만 아니다. 살아남아 있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고 참회와 용서와 이해를 학습케 하는 기능장이다. 그리고 죽은 자가 생각날 때마다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사회다.
우리 고향 합천, 한 시대를 책임졌던 의로운 이를 추억할 만한 장소가, 그가 나고 우리가 나서 자란 곳에 하나 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랴. 우리 고향에는 일해를 맞이할 넉넉한 품이 있다. 91년의 영욕을 다한 그를 안식케 할 공간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다. 낙동장강의 원류요 모천인 황둔(黃芚, 黃芚津, 黃江)이 있고, 인걸(人傑)을 낳은 지령(地靈)의 산 가야가 있다. 그곳, 내 고향 땅에 그를 뉘자. 한국의 전직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사후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 두 분은 그들이 마음대로 정한 ‘특별한 사유’로 인해 그곳으로 가지 못했다. ‘아쉽지 않은 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은 27대 태프트와 35대 케네디 두 명뿐이라 한다. 링컨의 유해는 그의 정치적 고향인 오크리지 묘지에, 아이젠하워는 고향 조그만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프랑스의 드골은 파리에서 6백여 리나 떨어진 시골 마을 콜롱베레 되제글리즈(Colombey-les-Deux-Églises)에 묻혔다 한다.
미국 초대 대통령 와싱턴도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지 않았다. 그의 가족이 잠든 그의 고향 남쪽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에 묻혔다. 그는 “나를 고향으로 데려 가다오. 나는 남부에서 나고, 남부에서 살고, 남부에서 일했다. 나는 남부에서 죽고 싶으며 거기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선대 묘역은 율곡면 기리(己里) 산 80번지에 있다. 그곳에 만년 유택을 마련한다면 와싱턴이 묻힌 마운트 버넌이나 드골이 묻힌 콜롱베레 되제글리즈가 되지 못할 법도 또한 없다.
그의 선영 가족 묘역의 비문 및 묘갈명은 추연 권용현과 권우(卷宇, 홍찬유)가 썼다. 그 기록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백제 온조왕 때 환성군(歡成君)으로 봉해진 휘 섭(聶)이라 한다. 그로부터 세계(世系)가 기록되어 있는데, 전 대통령의 선조부의 휘는 중봉(中鳳), 호는 송파(松坡)로 생몰년이 1869년~1936년이다. 선부군 휘 상우(相祐)는 호가 춘산(春山)으로 송파공의 4남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67년에 졸하였다. 나의 스승인 권우께서 묘갈명을 쓰시고 번역은 저에게 맡겨셨다. 그때가 무인년이었으니, 서기 1998년이었다.

斗煥相佑出 曾經陸軍大將 當選于第十二代大統領 卽爲大統領單任制實施 自日王快受過去日本對我 國累犯諸惡之痛謝 至於國際輸出入之制 解消年來累積赤字之蔽 反成黑字之國 仍成物價安定之策 又誘致國際五輪行事場 宣揚國威 我國經濟發展 未有盛於此時也 ㅡ處士松坡完山全公墓碣銘 幷序
(두환은 상우의 아들로서 일찌기 육군대장을 지냈고,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곧 대통령 단임제를 실시하였으며, 일왕에게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죄악에 대한 통분의 사과를 받아내었다. 또 국제 수출입 제도에 이르러서는 수년동안 계속되어 오는 적자의 폐해를 해소하여 도리어 흑자의 나라로 발전시켜 이로 인하여 물가 안정을 이루었다. 또 국제 올림픽을 유치하여 국위를 선양하였으니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이 이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다.)
일해의 유택도 그의 선영 이곳 어디쯤이면 좋겠다. 운명의 비바람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성벽이 될 것이니 너희가 차마 이곳까지는 ‘범하든’ 못할 것이다.

율곡면 내천의 기리
‘근본을 아는 과일’로 알려진 밤은, 나무가 크게 자란 뒤에도 뿌리를 캐보면 처음 싹을 틔웠던 밤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는ㅡ 그래서 밤골짜기 마을이 ‘율곡(栗谷)’이라는 면 이름이 되었으니 아, 우연인가. 이곳에도 이율곡을 사모하는 이 적지 않다. 근래까지 그의 학통을 이은 반구(反求) 경와(警窩) 목옹(牧翁) 등도 계셨고, 고개 넘어에는 추연(秋淵)이 계셨으니, 경상우도 합천, 합천 동쪽 율곡에 기호학(畿湖學)의 향기가 지금까지 5백년이 가깝도록 향기롭다.
맑은 강이 한번 굽어 마을을 안고, 안으로 스스로를 완성하고 부족함을 채워 나아가려는 이들이 사는 ‘내천(內川)’과 위기지학 수기치인 추기급인 기백기천을 교훈삼아 사는 이들의 ‘기리(己里)’ 마을ㅡ 근처에 소년 장수가 나 백마를 길들였다는 산성(白馬山城)이 있고, 지산(池山) 천지천(天地川)과 용덕산(龍德山)이 있다. 문필봉(文筆鋒)과 연지(硯池)도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수양으로 출발한 내면적 성취를 위한 학문이 추원보본의 전통으로 연면하고 있으니, 한 봇도랑의 물로 어찌 대하가 되었으랴. 이름이 헛되이 유전하는 것이 아니렸다.
합천 동부 초계에는 ‘삼방(三方)’이 있으니, 중방(中方) 두방(頭方), 그리고 완산 전씨가 세거하고 있는 기리 도방(道方) 일원이, 사족(士族)의 마을이다.
일해 문중의 선대조로, 탁계(濯溪, 전치원)가 계셨으니, 일해의 14대조라 한다. 고희에 가까운 연치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사족은 사족의 의무가 있으니, 이른바 ‘도덕적 의무’다. 그는 그것을 다했고, 묘역 또한 일해의 선영과 지호지간이다. 벼슬에 나아가면 ‘대부’가 되고, 물러나면 ‘사’가 되는 것을 <사대부(士大夫)>라 이르나니, 큰 선비인 그는 경향에 알려진 명필이었다. 그가 주희를 사모하여 쓴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중 ‘이곡(二曲)’은 초서의 전범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퇴계의 신주(神主)를 비롯, 남명과 황강(黃江, 李希顔)의 묘갈명을 썼다. 손자 두암(斗岩, 全滎)은 김해의 김수로왕 비문을 썼다. 초계 향교 <풍화루(風化樓)> 편액도 그의 글씨다. 특히 인조 때 통신사절단으로 일본에 갔는데 그 글씨가 그곳까지 알려졌다 한다. 혹자는 일해가 만년에 즐긴 서예에 운필과 필획이 예사롭지 않아 그 축적된 전통이 유전한 덕택이 아닌가 하고들 말한다.
그곳 일해의 선영 어딘가에 일해도 안장되면 멀리 영산(靈山) 가야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양지가 발라 봄볕이 포근한 배산임수면 더 좋을 것이다. <명당(明堂)>은 따로 없다. 의인이 묻히고, 인자가 묻히면 그곳이 ‘명당’이다..
일해를 키워 준 정든 강변 기슭이 나라 사랑에 멍든 그의 고통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다.
숲이여 강이여, 이제 다시 한번 그에게 안식을 줄 수 없는가. 넉넉한 기리의 품에 안겨 쪽배 미끄러져 가는 황둔의 나루를 바라보는 그곳에 일해를 뉘자.

기리의 산들이여,
문필봉이여,
연지여,
황둔의 강이여!

비색(否塞)의 운수를 만나 궁벽한 고을로 물러 나시었다고 말씀 마시라. 모든 산봉우리에도 휴식이 있다고 했나니 힘써 날고 지친 새 고향이 부른 것이니, 북악(北岳)의 걱정을 황둔의 언덕까지 잇지 마시라. 천하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가 다 누린 뒤에 즐거워 하던 그것도 거두시라.
일해를 키워준 우리 고향의 산과 강이 그를 보호하여 영원한 휴식에 들게 하자. 애오라지하나마 소박하게 가꾼 그곳에 일해의 유택을 조성하자. 그리하여 슬퍼도 찾고 그리워도 찾는 성소(聖所)로 만들자.

*필자 안병국 향우는 적중 두방 출신으로, 중앙대학에서 학·석·박사를 했다. 올림픽추진회 홍보본부장과 동양고전학회 회장, 중앙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 선문대학교 교수 및 인문외국어대학 학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