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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 향교 – 노덕경 수필가

초계군은 신라 삼국통일 후 757년 ‘강양군’으로, 고려 현종 때 ‘합주군’으로 1413년 (태종 13)에 합천군, 초계군, 삼가 현의 3개가 합천군으로 통합되었다. 그래서 합천군에는 초계향교(초계), 합천향교(야로), 삼가향교(삼가), 강양향교(합천)가 있다.
초계면 읍내라는 내동, 교촌, 아막은 합천군의 동부 5개면 교통의 요지요. 오일장에는 큰 우시장이 서고, 농산물거래가 활발했던 상업의 요충지다. 관공서와 농협, 중·고등학교가 있다. 나의 안티 고향이 향교가 있는 교촌이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과 유교 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으로 중앙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를 세웠다. 초계향교는 1628년(인조 6년) 창건된 교육시설이다.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227호다.
향교는 문묘文廟, 명륜당明倫堂, 동재, 서재와 기타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교육 공간으로 강의실인 7칸의 명륜당, 배향 공간으로 오성五聖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위패를 배향하는 대성전大成殿이, 동무 서무는 신라, 고려, 조선조 18현賢 위패를 봉안하고, 입구 팔덕문의 돌기둥 위 5칸의 풍화루風化樓가 있다.
조선시대에 향교는 지방의 구심점이었고 문화행사, 유교 행사가 열렸었다. 조선 후기에 서양 문물로 인하여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선현들의 제향 공간으로 춘계, 추계, 석전제를 행하고 있다.
집에서 비탈길을 오르면 외갓집이 나온다. 할머니께서 밀가루 반죽하여 하루 재우고 숙성하여 삼베 천에 반죽을 깔고, 동부 팥을 뿌려 부풀어 오르는 빵을 만들었고, 빵을 자르면 자투리 빵을 얻어먹을 수 있어 오일장 날 아침에 가곤 했었다.
외갓집, 한집 건너에 초계향교가 있다. 향교는 400여 년의 풍상을 이겨내고 자란 아름드리 주변의 회나무, 은행나무, 누릅나무가 풍우와 벼락에 맞은 체, 가지가 일부 부러져 있다. 나무 그늘에는 동네 아줌마와 할머니들의 휴식 공간이었고, 향교 ‘풍화루’ 2층에는 장정들과 어른들의 여름철 휴식 공간이다.
‘풍화루’ 동편 청석 바위 비탈에는 동네의 식수인 우물이 있었는데, 시집온 새댁들과 처녀들이 물 길어오는 것을 총각들이 곁눈질했었고, 개울 옆, 냇가 빨래터는 젊은 여인들의 시어머니 구박을 한풀이하듯, 빨래에 방망이로 스트레스 날려버리는 곳이었다. 또한 동네의 지난밤에 일어난 각종 사건의 ‘노랑 신문’ 소식들을 주고받는 아낙네들의 사랑방이었다.
꼬마들은 ‘풍화루’ 주전자로 시원한 우물을 길러 형들께 바쳐야 올라갈 수 있었고, 청년회에 키도 컸고 잘 생겨서 미군 부대의 ‘카투사’로 근무했던 형님 한 분이 계셨다. 그는 꼬마들의 대장인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같은 이야기도 입심 좋아 감칠맛 나게 이야기하여, 동네 어른들은 그를 ‘마이크’라 불렸다. 미군 부대 근무로 어린이들의 선망인 초콜릿 과자, 햄버거, 스테이크 양식 먹는 방법, 버그 컵의 커피, 그들의 생활상을 콩글리시로 어린 우리에게 신선하여 귀를 쫑긋하게 했었다.
한 번은 저녁에 형들과 고학년 어린이를 집합시켜, 달밤에 빛에 반사된다며, 옷을 홀랑 벗기고, 알몸에 숯 껌정 칠하여, 산 넘어 황강 모래밭의 수박 서리하여 머리에 이고 와서 함께 먹던 수박 맛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후에 간혹 땅콩, 참외, 콩, 과일, 등 서리하면서 청소년 시절의 허기를 달랬었다.
수구초심이라, 나이를 먹어가니 자꾸만 어린 시절과 고향의 산천이 떠오른다. 또한 동네 어귀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꼬부랑 돌담길이 죽마고우들과 전쟁놀이하면서 우정을 쌓았던 고향이다.
마을 뒷산, 봉황의 포란 터에 초계향교가 있다. 언제나 나의 마음속에 의연하게 자리 잡고 있어, 갈수록 어린 시절이 생각이 떠오른다. 고향 산천이 보고 싶어 찾아가면 죽마고우들과 이웃 형들은 삶의 천국을 찾아 뿔뿔이 도시로 해어져 만날 수가 없고, 세월이 구름처럼 흘러 친지와 이웃의 어른들도 먼 곳으로 가버렸다.
초계향교 ‘풍화루’와 명륜당은 어릴 적의 놀이터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나의 성장기를 보낸 곳으로 항상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