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난리록 (壬癸亂離錄) (1) – 淸隱전호열
이 자료는 서기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 勃發時(발발시) 초계고을에서 義兵(의병)을 일어켰던 濯溪 全致遠 선생의
文集(문집)에있는 壬癸亂離錄(임계난리록) 중 일부를 拔取(발취)한 文獻(문헌)이다.
壬辰年 4월 11일에 倭寇(왜구)가 쳐들어 왔다.
5월 12일에 先生(선생)이 道方里(도방리) 私邸(사저)로부터 집에서 부리는 下人(하인) 및 마을사람 數十人(수십인)등 應(응)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아들 雨와從子 霽를 불러서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시기를 우리집은 世臣(세신)이다 義理(의리)를 지켜 마땅히 북쪽(王)에 머리를두고 賊(적)을 죽여 털끝만한 功이라도 세울것이니 너희들은 각기 맡은바 분야에서 힘쓸지니라 하고 李精과 더불어 外面(외면)의 병을 불러모았다.
13일에 郡城(군성)에 赴任(부임)하여 李大期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할 것을 약속하고 擧義(거의)할 通文(통문)을 境內(경내)에 配布(배포)하여 數千人(수천인)을 糾合(규합)하여 당시 行政區域(행정구역)에 맞추어 內面(내면)과 外面(외면)으로 分掌(분장)하였다.
郭將軍(곽장군) 再祐의 陣(진)으로 應할수 있으서니 그 通文(통문)을 大略(대략)하여말하지면 列邑(열읍)의 守令(수령)은 도무지 내몸만 알았지 國家(국가)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으니 擧皆(거게)가 失守(실수)하여 瓦解(와해)하기에 이르렀다. 嗚呼(오호)라! 嶺南士大夫(염남사대부)는 그 가히 束手無策(속수무책) 逃命(도명)함으로 宗國(종국)이 장차 망함을 보고만 있을것인가?
이제 郭義士(곽의사)가 나라를 위하여 萬번 죽울각오로 제일먼저 義兵(의병)을 引導(인도)하여 凶鋒(흉봉)을 遮斷(차단)하였으니 우리고을은 비록 狹小(협소)한 적은 고을이지만 어찌 忠信(충신)한 선비가 없겠는가?
오직원하노니 諸君(제군)들은 同聲(동성)으로 復讐(복수)할 것이며 아래로는 百姓(백성)을위하여 安堵(안도)하도록 云云(운운) 하였다.
그때에 本 郡守(본 군수) 李惟儉이 먼저 도망하여 士民(사민)도 따라 도망하니 先生이 通諭文(통유문)을 발송하여 義理(의리)를 열어 보았다.
이에 盧錞과 金瑛과 鄭舜臣과 安克家와 柳世溫과 李胤緖와 盧世棋 鄭惟一과 李海龍과 安喆등이 모여 會同(회동)하여 機務(기무)를謀議(모의)하였다.
이보다 앞서 招諭使(초유사) 金誠一이 咸陽(함양)에 이르렀는데 前 縣令(전 현령)趙宗道 前 直長(전 직장) 李魯가 期約(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모여서 列邑(열읍)에 義兵(의병)을 召募(소모)하는 令(령)을 傳(전)하였더니 金沔이 居昌(거창)에서 起兵(기병)하고鄭仁弘이 陜川(합천)에서 起兵(기병)하고 諸郡(제군)에서 響應(향응)할者 또한 많았으며 先生(선생)은 草溪 外面(초계외면)의 兵力(병력)으로 서로가 聲援(성원)하였다
缺日(결일) 郭율이 草溪人(초계인) 卞德壽로 郭義兵將(곽의병장)을 謀害(모해)하려고 편지를보내 해명을 구하거늘 그 片紙(편지)에 대략 말하기를 난리중에朔戀(삭연)하는 생각에 더욱 이기지 못해하니 어느때나 凶賊(흉적)을 掃蕩平定(소탕평정)하여 太平(태평)할 때 面目(면목)을 다시 보겠는가?
특히 貴郡(귀군)의 卞德壽는 名人(명인)이라 稱(칭)할만한데 郭再祐를 죽이려고 기회를 감추고 엿본다 云云하거늘 물어옴에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으니 郭氏(곽씨)는 나라를위하여 討賊(토적)하여 一邑(일읍)의干城(간성)이 되었거늘 이에 죽이면 문득 이는 豊臣秀吉(풍신수길)의 忠臣(충신)이요 我國(아국)의 叛賊(반역)이라 德壽의 뜻은 반드시 郭氏(곽씨)로 巡察(순찰)을 討伐(토벌)하려는 罪(죄) 때문이다. 巡察(순찰)은 홀로 可謂(가위) 罪(죄)가없다고 하겠는가?
曺大坤은 更迭(경질)되지 아니하고 慶尙一道(경상일도)에 陷沒(함몰)하였으니 누가그 허물을 맡으려 하겠는가?
특히 朝廷(조정)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라 이와같이 國勢(국세)가 危弱(위약)할 때 三人(삼인)이 틈만얽어 맬뿐이니 德壽는 義理(의리)의 所在(소재)를 알지 못하고 이 無禮(무례)한 擧借(거차)를 하면 非但(비단) 마침내는 몸을 장사 지낼곳이 없고 겸하여 國事(국사)로 하여금 끝내 收拾(수습)할수없게 될것인즉 德壽의 罪(죄)를 어찌 容納(용납)하겠는가? 다행이 여러 侍臣(시신)에게 密告(밀고)를 개시하여 凶謀(흉모)를 일찍이 거두면 幸甚(행심) 云云하였으니 곧 德壽를 불러서 曉諭(효유)하도록 시키니 끝내 害(해)치지 못하였다.
6月9日 李大期와 더불어 臨時郡守(임시군수) 郭율을 맞이하여 만나보고 軍事(군사)를 議論(이논)하는데 參與(참여)하였으니 무릇 軍屬(군속) 軍器(군기) 軍需品(군수품)을 內外面(내외면)에 分屬(분속)키로 하였는데 先生(선생)은 문득 軍糧(군량)을 스스로 갖추었으며 官家(관가)의 穀食(곡식)은 取(취)하지 않았다.
11日 沙漠津(사막진)에 出陣(출진)하여 倭船(왜선)을 만나 接戰(접전)하여 그의 大捷(대첩)함에 이르렀으나 賊(적)의 援兵(원병)이 甚(심)히 많아서 全勝(전승)하기 어려웠으나 또 力戰(력전)하여 數十級(수십급)을 斬首(참수)하니 賊(적)이 점점 退却(퇴각) 하였다
15日 耕牛(경우)를 잡아서 兵士(병사)들에게 잔치하고 글로서 誓約(서약)하니 그 大略(대략)하여 말씀하시기를 天地(천지)의 鬼神(귀신)이 臨(임)하여 위에 있고 칼이 곁에있다 오늘 나라를 위하여 復讐(복수)하고 羞恥(수치)를 씻으려고 誓約(서약)함이니 上下同志(상하동지) 百人(백인)이 一心(일심)이되면 水火(수화)인들 달려갈것이며 아마 或(혹)이라도 令(령)을 어긴다면 軍律(군율)로서 論(논)할것이니 常道(상도)를 지킬줄 알것같으면 죽음 또한 부끄러움이 없을것이다.
云云 하였으니 이로보터 軍勢(군세)가 스스로 倍가 되었다.
17日 賊兵(적병) 數千(수천)이 不意(불의)에 衝突(충돌)하여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가 재물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또한 官廳(관청)까지 미치거늘 드디어 內將(내장)이 軍馬(군마)를 整頓(정돈)하여 크게 放砲(방포)하고 북을치고 소리지르며 달려나아가 或(혹)은 두들겨패서 싸우고 혹은 말을달리며 활을쏘아 斬獲(참획)함의 數(수)가 많으니 賊(적)이 敢(감)히 함부로 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함으로 因하여 退走(퇴주)하니 客舍(객사) 및 郡內(군내)가 모두다 불타버리는 憂患(우환)을 免(면)하였으며 이 뒤로부터는 江을 지나는 賊(적)이 敢(감)히 길게 몰려 陣(진)을 치지못하고 달아나 도망을 가거늘 人民(인민)이 점점 돌아와 모여서 혹은 보리를 수확하고 혹은 除草(제초)를 하니 內外面(내외면)의 백성이 조금은 安心(안심)하고 그業(업)에 從事(종사) 하였다
27日 아들 雨와 더불어 數騎(수기)를 거느리고 賊(적)을 엿보는데 忍然(인연)히 좁은땅을 지나가다가 賊(적)이 크게 다가오는지라 앞은 江(강)이요 뒤는 山(산)이라서 거이 脫出(탈출)할수없거늘 곧 몸을날려 말에 뛰어 올라 험준한 언덕을 直上(직상)하여 避身(피신)하였으며 아들 雨는 江中(강중)에 화살을 짊어진 賊(적)을 따라가 그 머리를 베어서 떠 올라오거늘 招諭使(초유사) 金誠一이 듣고 기뻐하여 卽時(즉시)에 말을 달려馳啓(치계) 하였다.
7月 2日 臨時義兵將(임시의병장) 鄭彦忠과 陳漢彦이 來訪(내방) 하였다
13日 居昌(거창) 陜川(합천) 星州(성주) 高靈(고령) 軍(군)과 더불어 合勢(합세)하여 茂溪(무계)에 駐屯(주둔)하고 있는 賊(적)을 나아가 討伐(토벌)하고 그 모아놓은 糧食(식량)과
寶物(보물)을 所藏(소장)한곳을 전부 다 태워버리고 一屯(일둔)의 兵力(병력)을 射殺(사살)하였는데 해질 무렵에 살아남은 왜놈을 힘써 구하려고 玄風(현풍)으로부터 갑자기 병력이 몰려와 不得已(부득이) 還軍(환군)하였다
그때 金沔을 居昌義兵將(거창의병장)으로 鄭仁弘을 陜川義兵將(합천의병장)으로 金應聖을 高靈義兵將(고령의병장)으로 文勵와 李弘宇를 星州義兵將(성주의병장)으로 삼았다.
22日 여러 邑兵(읍병)과 더불어 洛東江(낙동강)의 賊을 따라 내려가다가 馬首院(마수원) 江中(강중)에 미치자 大破(대파)하니 賊勢(적세)가 窮(궁)하여 쭈구려들거늘 다투어 江中(강중)에 떨어지니 屍體(시체)가 江을막고 8척의 배에탄 倭賊(왜적)은 거의다 물에빠져 죽었는데 孫仁甲 또한 물에 빠져죽었다.
그때 孫仁甲은 陜川臨時義兵將(합천임시의병장)이 되었다.
큰비가 내려 만부득히 本陣(본진)으로 돌아 왔다.
8月 1日 臨時郡守(임시군수와)와 內郡義兵將(내군의병장)과 더불어 黃芚江(황둔강)위에서 만나 軍務(군무)를 議論(의논)하고 해가 저물러 곧 돌아왔다.
招諭使(초유사) 金誠一이 慶尙左道(경상좌도) 監司(감사)로 轉勤(전근)하라는 令(령)을 받들고 道(도)를 떠나려하거늘 草溪(초계)의 李大期와 더불어 招留(초유)하는 글을 올렸다.
29日 假守(가수) 內義將(내의장) 및 朴京賢 朴思齊와 더불어 洛東江(낙동강) 上(상)에모여서 攻擊(공격)하여 奪取(탈취)할 일을 論議(논의) 하였는데 玄風守(현풍수) 辛礎가또한 來會 (내회)하였다.
9月 4日 새벽에 닭이 울 무렵 內將(내장)과 더불어 金 招諭使(김 초유사)를 甘勿津(감물창) 上(상)에서 送別(송별)하였다.
8日 臨時守令(임시수령)과 더불어 兵(병)을 거느리고 高靈安林(고령안림)으로 달려가다 鄭德遠 將軍(장군)의 令을 받다. (계속)
參考文獻 ; 濯溪 先生 文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