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13)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백용성 스님 행장
백용성 스님은 1864년 5월 8일 출생하여 대한민국 일제강저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상규(白相奎)이며 법호는 용성(龍城), 법명은 진종(震鍾)이다.
전라남도 장수군 변암면에서 출생하여 한때 전라남도 남원군 송동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16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했고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다.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고 깨달은 스님으로 알려졌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백용성 스님은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농사도 지어야한다고 주장하여 함양에 화원과 과수원을 만들었으며 북간도에서 농장을 만들었다.
저서로는 “수심론”, “어록” 등이 있다. 1940년 “사자(獅者) 뱃속에 충이 생겨 사자가 쓰러지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곧 열반에 들 것을 예고했다.
▲독립운동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으로 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신의 인장을 한용운에게 위탁하여 불교 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 불교께 대표로서 참가했다.
당시 불교 대표는 2인으로 백용성과 한용운이다.
백용성은 한용운의 사형이었고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사협인 백용성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님의 침묵”의 님은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일설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해달라는 간청에는 침묵한채 참선만 하고 앉아있는 사형에 대해 쓴 것이라고 한다.
그무렵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자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무아(無我)의 사상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결속시키는데 앞장섰다.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불상, 불교에 관련된 유물을 가장해 상해임시정부로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1930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3귀5계를 주어 불자로 삼았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장개석, 장쉐랑, 마요쩌둥을 차례로 만나 대한의사군무장진격 작전을 지원 요청했다. 귀국하여 대한의사군을 모집하던 중 안모라는 일제밀정에 의해 계획이 들통나 북간도에 마련했던 독립군의 거소가 완전히 파괴됨으로서 21만명의 조.중.무장 진격전이 무산되고 말았다.
▲ 불교정화운동
불교계에서는 조선후기의 불맥인 지안조사가 135년 만에 용성스님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출옥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일제가 사회문화 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불교에서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자신이 세운 대각사(大覺寺)를 중심으로 왜색 불교추방 운동에 앞장섰다.
감옥에서 한글 성경을 가지고 있던 목사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1921년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
1924년 잡지 <불일(佛日)>을 박한영과 함께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한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차례 제출했다. 대처승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 대신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8년 조선글 화엄경을 펴냈다. 당시의 언론은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하였다.
사원경제의 자립을 위해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자급형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쳤으며 여기서 나온 수익금을 해외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화엄경 등 경전의 한글화 작업과 일요어린이법회 개설, 거리 포교 및 찬불가 도입 등으로 불교 대중화의 포교 방법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양복을 입고 금광도 개발하는 등 절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크게 힘썼다.
사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병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