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23)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王師)
조선 최고의 고승,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 법명 자초(自超)는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한 불교 승려이며 합천이 낳은 역사상 큰 인물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에게 깊은 존경을 받아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王師)가 되었다. 지공(指空)에서 나옹혜근(懶翁慧勤)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전해 받아 저들과 함께 고려 말 삼화상(三和尙)으로 일컬어진다. 당시 한양천도(漢陽遷都)를 통해 조선 건국의 기틀을 세우는 데 관여하였을 뿐 아니라, 왕사라는 위치는 당시 정신적 최고의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조 이성계에게 당시 정치범 사면을 권하거나, 백성들을 어버이처럼 보호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애민정책의 가르침을 주는 등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정신적 뒷받침을 했다. 또한 당시 숭유억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인해 역사상 최고의 불교탄압을 받게 되는 조선시기에 그나마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다.
조선 후기 들어와서는 무학은 민초들에게 ‘풍수가’로서 친근하게 알려지기도 했다. 합천 지역에만도 여러 설화가 있다. 신승(神僧:기이하고 뛰어난 승려)이나 효자(孝子) 설화 등이다. 무학과 관련한 여러 가지 기록 야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설화 등에서 대사에 대한 민초들의 친근한 감정들이 잘 들어난다.
무학대사전설은 하나의 줄거리로 전하지 않고, 모두 네 가지 삽화(揷話)로 전해진다. <학의 보호>, <쌀 나오는 구멍>, <무학대사를 나무란 농부>, <나무 예언>이 그것이다. 가장 각편이 많은 <무학대사를 나무란 농부>의 내용은 이렇다. 무학이 이성계를 도와 한양 터를 잡고 궁궐을 지었으나 지을 때마다 쓰러지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또는 도읍지를 물색하느라 왕십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학이 도망가다 보니 밭 가는 농부가 자기 소를 보고 미련하기가 무학보다 더하다고 꾸짖자, 무학이 농부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농부는 서울이 학의 형상인데 몸통 부분에 궁궐을 지으니 무거워 날개를 치므로 궁궐이 쓰러진다며 먼저 날개에 해당하는 지역에 4대문(또는 성곽)을 짓고 나서 궁궐을 지으라고 했다(또는 도읍지를 물색하는 무학에게는 10리만 더 가라고 했다). 무학이 농부의 말대로 하여 궁궐을 지을 수 있었다. <나무 예언>의 내용은 이렇다. 무학대사가 태어난 곳인 간월도를 떠나게 되었다. 나무(지팡이)를 가리키면서(꽂으면서)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고,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라.”라고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죽었던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