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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족쇄 – 문계성 수필가

이른바, 선(禪)의 황금시대를 살았던 남전(南泉)선사가 어느 절에 주석할 때, 절의 납자(衲子)들이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두고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으로 나누어져 싸우는 것을 보았다. 남전이 시비거리가 된 고양 새끼를 치켜들고 납자들에게 말했다. “한 마디일러라!, 한마디 이르면 이 고양이를 죽이지 않겠으나, 만약 한 마디 이르지 못한다면 이 고양이의 목을 베겠다”. 그러나 한마디 하는 납자가 없자, 남전은 그 자리에서 칼로 고양이의 목을 베어버렸다.
남전이 외출했다 늦게 절에 돌아온 조주(趙州)에게 낮에 있었던 이 이야기하며 물었다. “너 같으면 무어라 일렀겠느냐?” 그러자 조주는 남전을 한 바퀴 돌고는, 그의 짚신을 벗어 머리를 이고 걸어 나갔다.
그러자 남전이 소리쳤다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선가(禪家)의 화두(話頭)가 된 남전참묘(南泉斬猫)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골수(骨髓)는 무엇일까?
저 악명으로 유명하기 짝이 없는,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한 킬링필드의 주인공은 폴포트다. 그는 극단적 공산주의 무장집단인 크메르 루즈를 지휘하여, 1975년 당시 친미적 군사정권인 론롤 정권을 뒤엎었다. 정권을 장악한 폴포트는 공산주의식 평등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더러운 자본주의가 물든 곳이라며, 수도인 프놈펜을 비롯하여 큰 도시의 주민들은 전부 농촌 집단농장으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다. 평등하려면 복장도 두발도 모두 같아야 한다면서 옷과 머리 모양도 꼭 같이 하도록 강요했다. 자본주의의 모든 요소를 없애겠다면서 화폐를 철폐하고 중앙은행도 없애버렸다. 나라가 암흑이 되어 버렸다. 스탈린과 모택동의 철저한 숭배자였던 그는 모택동이 17-8세의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일으킨 문화혁명을 흉내 내고 싶었을까? 그도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공산주의 사상교육으로 철저하게 세뇌시켜, 아이들의 손에 무기를 들려주며 반동을 색출하여 죽이도록 선동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무기를 들고 그들의 이웃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대체 그 또래의 어린아이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 그 맑은 영혼에 계급투쟁이라는 처절한 증오의 씨앗이 심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들이 악령에 사로잡혀 죽창을 들고 혁명 구호를 외치면 어떤 일이 벌어 지겠는가?
폴프트는 캄보디아 최상층계급 출신이므로, 생계를 위한 노동자의 고달픈 노동이나 배고픔을 모르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나라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프랑스 유학까지 할 수 있었던 선택된 자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평등을 외치며, 안경을 쓴 사람, 손이 고운 사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간주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현실적으로 산 삶이 가장 반인민적인 선택된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반동적인 자기의 삶은 비판하지 않고, 캄보디아 전 인민을 상대로 인민의 적을 찾아 증오를 표출하는 극단의 모순을 표출했다.
가장 비열한 자는 어떤 자일까? 자기에게 내재된 모순과 죄악에는 눈을 감고, 자기가 누린 불평등에는 눈을 감고, 타인에게서 불평등과 악마성을 찾아 벌주는 것일 것이다. 관념에 지배당하는 독재자의 정의(正義)는 항상 그렇다.
그가 심취한 공산주의 관념이, 선택된 삶을 산 그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 순수한 아이들의 영혼까지 그렇게 만들었다.
이데올로기가 무어라 생각하는가? 4월의 꽃보다 더 아름답고, 당신이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인가? 그것도 사람의 생각이 만든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모택동은 영구적 공산주의 혁명을 부르짖었다. 공산주의 가치 이외에는 전부 파괴해 버리겠다면서, 아이들은 선동하여 공자(孔子)를 매도하고 공자 사당(祠堂)을 부수었다. 그리고 지식인들을 죽이거나 집단농장으로 보냈다. 그의 이데올로기는 옳았을지 모르나 인민의 삶은 피폐했다.
모택동이 죽은 다음 권력을 잡은 등소평은, 그의 고향을 방문하고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인민들의 삶이 그가 평생 목숨을 바쳐 이룬 공산혁명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민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었다. 그는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마 그는, 그가 목숨을 바쳐 추구한 것이 ‘풍족한 삶’이었는지, ‘이데올로기의 추구’였는지 자신에게 물었을 것이다.
‘풍족한 삶’은 목적이었을 것이고, ‘이데올로기의 추구’는 하나의 방편이며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데올로기가 행복한 삶에 우선하는 가치라면 이는 분명 본말의 전도(轉倒)일 것이다.
쥐 잘 잡는 고양이라면 털 색이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그는 생각을 바꾸었을 것이다.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지 구태여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黑猫白猫) 가릴 젓이 없다. 쥐 잡는 고양이의 미덕은 쥐를 잘 잡는 것이다.
이 키가 매우 작은 사나이는, 그가 목숨을 바쳐 숭배해온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볼 수 있는 솔직함과, 관념의 허울을 과감하게 벗어 던질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중국이 누리는 풍족은,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벗어 던질 줄 알았던, 이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나이의 선물이다.
공산주의라는 그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수많은 인민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고서도 끝까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소위 혁명가와, 자기가 만든 세상을 보며 미안해하며 오열하는 소위 혁명가 중, 누가 진정한 혁명가일까?
이데올로기는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파랑새일까? 아니면 구속을 가져오는 족쇄일까? 삶보다 우선하는 이데올로기라면 분명 족쇄가 될 것이다.
짚신같이 하잘 것 없는 한 가닥 생각을 머리에 이고, 그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삶을 중생이라 했다. 이데올로기도 삶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그 용도가 끝나면 헌 짚신처럼 버려야 한다. 지금도 그것을 머리에 이고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 노예들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