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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범퍼는 부딪히라고 있는 것”이라며 조용히 떠난 여인 – 정병수 공인회계사

내가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지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일이다. 그 이후 줄 곧 운전을 하였지만, 다행히도 소소한 접촉사고 말고는 대형사고는 없었다.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머리가 반백이 되고 손자 손녀도 있는 나이로 접어드니 친구들도 하나둘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반납한다는 소리도 들리고, 어떤 친구는 아예 자동차를 처분해버렸다고까지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운전대를 조심스레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성과 민첩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시력도 갈수록 저하되어 밤이 되면 운전하기가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다가 차를 몰고 시내를 가다보면 뒤에서 울려대는 크락션 소리에 깜짝깜짝 놀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한번은 일을 마치느라고 저녁도 먹지 못하고 집으로 운전하여 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경찰차가 내 차 옆으로 다가오더니 차를 오른쪽으로 세우라는 신호를 한다. 순간 “내가 무슨 위반을 했나?”라며 생각해봤지만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차를 옆으로 세웠더니 다짜고짜 음주 운전 여부를 체크한다. 음주는 고사하고 저녁도 못 먹은 상태에 무엇이 잘못이랴! 연이어 “이상하네!” 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경찰관을 보노라니 짜증이 난다.
“괜히 생사람을 잡아놓고, 왜 그러세요?”라며 항의를 하니 “죄송합니다. 사실 신고가 들어와 조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더붙여 하는 말이 “기분 나쁘시겠지만 오늘 이 조사가 큰 사고를 미리 예방했다고 생각하시면 기분이 좀 풀릴 것입니다.” 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교통경찰이 센서있고 오히려 고맙게 여겨졌다. “신고를 받은 것으로 보아, 내가 비록 음주 운전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해받을 운전을 한 것은 확실할 거야! 내가 의식하지는 못 했지만…..”
자동차를 몰다 보면 사고를 피할 수는 없다. 내가 운전을 잘못할 수도 있고 상대방이 실수할 수도 있다. 그동안 자그마한 접촉사고를 포함해서 십여 차례의 차량사고가 있었다. 그중에 두 경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번은 사당동에서 친구들과 회식을 하고 골목에서 큰길로 나오는 중이었다. 도로가 좁아 차량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길이었다. 운전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움직이질 못하고 정차하고 있는데 상대편 트럭은 기어이 그 좁은 길을 비좁고 나가려 하다가 내 차를 긁었다. 내려서 옳고 그름을 따질 새도 없이 뒤 따르던 양쪽의 차들은 크락션을 울리며 빨리 가라고 야단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상대방 기사의 명함만 받고 헤어졌다가 3~4일 후에 수리비 견적을 받아 가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사당동에서 내 차를 긁고 간 기사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기에 견적이 이 정도 나왔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상대방 기사는 “선생님 차는 까만 차지요?” 하기에, “예, 검정색 그랜저였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문방구에 가시면 까만 구두약이 있습니다. 그걸 사다가 긁힌 곳에 박박 문지르시면 아무런 티가 나지 않으니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우습기도 하고 더 이상 이야기를 하기가 멋쩍어서 “일단 오늘은 끊읍시다.”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보니 그 발상도 기발하지만, 그런 말을 가볍게 던질 수 있는 대담한 사회성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틀이 지난 후에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건 너무하지 않았습니까? 어째 구두약으로 차 수리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상대방은 “아니 그렇게 하면 된다니까요!”
더 이상 잘 잘못에 대하여 논쟁을 해봐야 시간만 허비될 거 같다. 내가 “정 그러시다면 내가 반을 낼 테니까 선생님은 반만 부담하시죠.”라고 제의했더니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으려 버톤을 누르르고 하는데 저쪽 수화기를 통해 “그 참, 구두약으로 하면 된다는데…..”라는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세상에 별난 사람도 있구나싶다. 또 한번은 내가 잘못하여 접촉사고를 냈는데, 상대방의 아름답고 깔끔한 처리가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다. 원주에서 강의를 마치고 고속도로로 집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대략 오후 6시 정도가 되면 판교 톨게이트를 지나 양재 나들목에 도달하게 된다. 이 곳은 상습 정체구간이다. 섰다 갔다를 반복하는데 졸음이 쏟아진다. 졸지 않으려고 창문을 열어보기도 하고 기지개를 켜보기도 하고 물도 마셔보지만 소용이 없다. 어느 순간 내가 앞차를 박은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앞 차에서 내리는 운전기사는 의외로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 여성은 다짜고짜를 따지기 전에 자기 차의 범퍼가 약간 찌그러 진 것을 확인하고는 “보험 들으셨죠?” 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아 그럼 됐습니다. 범퍼라고 하는 것은 부딪히라고 있는 것입니다. 보험에 가입해있다고 하니 제가 보험으로 수리를 할 테니 그렇게 아시고 걱정하지 마시고 가세요.”
나는 너무나 의외의 말씀에 의아해하며, 저런 경우는 나중에 “뒤끝이 있을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에 이르자 머리가 맑지 않아 걱정스러웠다. 집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참! 별 것도 아닌 걸로 또 전화를 하셨네.”며, “저는 그런 일로 병원에 드러눕고 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선생님 열심히 사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앞선 트럭 사고와는 참 대조되는 운전자인 것이다. 아니 존경하고 싶은 여걸이었다.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웃음과 함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떠오른다. 그리고 성악설과 성선설이 대비되는 이유가 뭘까?
2021년 세계 주요 자동차 생산국 현황’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동차 생산량은 약350만대로 세계 5위이다. 한편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대수는 2500만대를 돌파했다. 국민 2명 중 1명은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지 인구 10만 명당 도로교통사고사망자수는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4가량 줄었다고 하니 오랜만에 기쁜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