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변신한, 강만수 전 장관의 단편소설’ 동백꽃처럼 (3)
나는 「미뇽」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조용히 읽었다.
“참 좋은 시군요.”
“내가 암송하는 유일한 독일 시입니다. 사실은 입시 공부로 외웠습니다.”
그녀도 노트를 꺼내 무엇을 적어주었다.
“「산비둘기」라는 시인데 읽어보세요.”
산비둘기 두 마리가
귀여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였답니다
그 나머지는 말할 수 없답니다
프랑스 시인 장 콕토의 시라고 했다. 내 고향마을 뒷산에서 구꾸구꾸 하고 울던 산비둘기를 생각했다. 추풍령 은하 아래서 산비둘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머지’가 무엇인지는 생각도 못 하고.
은하호 열차는 영동을 지나 으스름달이 산하를 비추는 금강 변을 달렸다.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괴테와 콕토에 대해 이야기했다. 열차가 대전역에 들어서자 모두 우르르 플랫폼으로 나가 가락국수를 먹었다. 우리도 사람들을 따라 나가 국수를 후루룩 마시듯이 먹고는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천안을 지나 안성평야를 달릴 때 먼동이 트고 산등성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물에 젖은 솜같이 피곤함에 절었다. 열차가 한강철교를 지나며 요란하게 철커덕 소리를 낼 때까지 깜빡 졸았다.
서울역에서 나는 그녀의 큰 트렁크를 들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광장을 지나고 큰길을 건너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녀의 트렁크는 무거웠다.
나는 그때까지 그녀의 이름도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도 묻지 않았다. 나는 대학 들어와서 고시에 합격할 때까지 여자를 사귀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때까지 지키고 있었다. 시골에서 나를 바라보며 농사짓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래야만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가정교사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머리카락이 날리는 그녀의 옆얼굴에 미뇽의 모습이 다시 겹쳤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알지 못했던 감정에 끌려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김해자입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그녀가 대답했다. 아직 신촌으로 가는 그녀의 버스는 오지 않았다.
“학교는요?”
“H 대 도안과입니다.”
내가 탈 성북동 가는 버스가 왔지만 나는 그녀의 무거운 트렁크를 버스에 실어주기 위해 그녀의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전화번호는 ······”
“32국에 4780번입니다.”
고시 합격할 때까지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벼락 맞는 확률의 우연한 만남이 산비둘기 이야기로 바뀌는 도화선이었다. 그것이 슬픈 전설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신촌 가는 버스에 그녀의 트렁크를 올려주고 나는 성북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가 기숙하는 동천학사는 성북동 버스 종점에 있었는데 이화동 S 법대 캠퍼스까지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애써 그녀의 기억을 지우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최루탄 맞으며 데모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청운동 전차 종점 뒤 청와대 서편에 있는 큰 저택에서 K 고등학교 3학년을 시간제로 가르쳤다. 내가 가정교사를 하면서도 데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친구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나에게 가정교사 자리를 두 번이나 소개해 주면서 친해진 그 친구는 S 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는데 한일회담 반대 데모부터 박정희의 3선 개헌 음모의 분쇄 데모까지 핵심 주동자였다. 나는 그를 따라 플래카드를 들기도 하고 혈서를 쓰기도 하며 함께 행동했고, 종로 5가 골목에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시며 나라를 걱정했다. 데모하는 나를 걱정하던 시골 어머니는 동생을 시켜 “아버님 위독. 급거 귀향 요망“이라는 전보를 보내 나를 붙잡기도 했다. 하지만 S 법대생 대부분은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고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하다가 휴교령이 내리면 산속의 절로 들어가 공부했다. 나는 휴교령이 내려도 가정교사 때문에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가 지내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성북동 기숙사로 걸어가던 밤이었다. 대학천 가로등 아래 팔짱을 끼고 얘기하며 걷고 있는 동급생을 보는 순간, 나도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운명 같은 생각이 솟아올랐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그녀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하숙집 아줌마가 그녀에게 전화를 바꾸어 주자 나는 바로 내일 오후 5시 광화문 비각 뒤 금란다방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그녀가 예라고 대답하자 전화를 끊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적인 행동으로 나의 다짐은 간단하게 깨졌다.
그녀와의 만남은 내가 청운동 고3을 가르치는 동안은 월요일 오전 10시에 금란다방에서 이어졌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주말에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월요일은 쉬었기 때문이었다. 태양이 눈 부신 여름날 교외선을 타고 일영 냇가로 가서 그녀가 이젤에 캔버스를 걸고 그림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름방학에는 부산 해운대 백사장과 동백섬을 걸었다. 낙엽이 지는 가을날에 북한산 계곡을 걸었고, 눈 오는 겨울날에 창덕궁 비원의 눈길을 걸었다.
그녀를 만난 후 갈수록 공부도 데모도 시들해졌다. 그녀를 만날수록 더 만나고 싶고, 생각할수록 더 생각이 나고, 얘기할수록 더 얘기하고 싶은 목마름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종이와 풀을 섞어 붙이고 검정색과 회색과 진홍색 물감을 칠한 벽걸이를 만들어 내 기숙사 방에 걸어 주었고, 검은 바탕에 진홍색 원과 삼각형이 그려진 넥타이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생일날 광화문에 있는 고급 일식집 ‘일력’에서 가정교사 월급으로 초밥을 사주었는데 와사비가 코를 찔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대학 3년 동안 한일회담 반대에서 시작하여 3선 개헌 반대로 이어지는 데모로 캠퍼스는 낭만은커녕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날이 많았고, 수시로 내리는 휴교령 때문에 강의도 시험도 제때 치르지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종로 5가 골목에서 막걸리에 취해 교가를 패러디한 “오늘 데모 내일 술집 S 법대다”를 외치며 비틀거리고 토하고 꼬꾸라지는 날이 많아졌다. 계속 말을 바꾸어 장기 집권으로 가는 군사정권에 저항하면서 아프리카보다 못사는 조국의 참상에 우리가 분노할 때, 중산층은 꿈과 희망이 사라진 조국을 등지고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다.
겨울방학 때 부산을 갔던 나는 낙동강의 강바람을 맞으며 그녀와 구포대교를 걸어서 건너고 둑길을 발이 시리도록 걸었다. 붉게 넘어가는 저녁놀을 보면서 암울한 조국을 떠나 브라질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해 한국외환은행이 브라질 상파울루지점을 개설하게 되어 그 은행에 들어가면 브라질을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조국인데 꿈이었던 고시를 한 번이라도 도전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그녀는 말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대학 4학년이 되자 나는 중3을 가르쳤는데, 그때는 일요일에 쉬게 되어 그녀를 따라 명동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마치면 소문난 종로2가 ‘미진’에서 메밀국수를 먹기도 했다. 어느 일요일에는 외화 전문 ‘중앙극장’에서 세계적인 인기 영화 <부베의 연인>을 보았다. 감옥에 있는 부베를 면회 가는 연인 역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고시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준비하여 4학년 때 처음 치른 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낙방이 발표된 날 친구들과 삼각산 아래 진관사 계곡에서 취하고 허우적거렸다. 며칠 후 나는 그녀의 서교동 하숙집과 가까운 대폿집에서 정신이 나가도록 막걸리를 마시고는 남은 길은 이민뿐이라고 얘기했다. 그래도 한 번 더 도전해보라는 그녀의 간절한 설득에, 시험에 합격하는 날에 만나겠다고 호기롭게 약속하고 다시 공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불구하고 대학을 졸업한 그해에 또 떨어지고 말았다.
그해 가을에는 군대 징집을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어 창원훈련소에 입소하였는데 난데없이 폐결핵 판정을 받아 3일 만에 귀향 조처되었다. 길게 뻗은 훈련소 버드나뭇길을 걸어 나오면서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절망에 울었다. 고향 가는 버스를 타고도 가눌 수 없이 눈물을 계속 쏟았다. 폐결핵은 고시의 도전도 이민의 꿈도 모두 암울하게 만들었다. 고향에 돌아간 다음 날 보건소에 등록하고 매일 파스를 스무 알씩 한 움큼을 먹으며, 한 주일에 한 번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맞으며 폐결핵 치료에 들어갔다. 나는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약을 먹고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만들어 주는 개소주를 먹으며 치료에 전념했다. 그래도 한 가지 줄은 잡고 있어야 살아있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보건소장과 고시의 도전에 대해 의논했다. 그는 정신력이 폐결핵을 극복하는 데 중요하다면서 나의 도전에 동의했다. 그 대신 하루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공부하고 10시간 이상 잠을 자도록 권고했다.
고향 집에서 다시 고시 공부에 들어갔다.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릴 때는 밤늦도록 들길을 걸었다. 그녀를 생각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날 나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수정동 그녀의 집 골목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야위어진 몰골을 가지고 그녀를 만나기 싫었다. 내가 처음 낙방하고 한강 변에서 막걸리 대포로 취했을 때 사실상 고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만나지 말자는 약속도 했던 것이다.
부산에 갔다 온 뒤로는 더욱 성실하게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개소주를 먹으며 하루 네 시간 공부하고 밤이 되면 잤다. 눈물이 날 정도로 외로우면 달을 보며 노래 부르며 들길을 끝없이 걸었다. 모든 일이 정지된 속에서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공부는 집중력을 높여주어 공부가 더 잘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다가 매일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하는 식사를 하는 것도 치료를 빠르게 했다. 나의 폐결핵은 석 달 정도의 치료를 받자 남에게 전염시키지 않는 수준으로 좋아졌다.
그렇게 고시 준비를 한 다음 해 5월, 세 번째 도전에 기적같이 합격하여 산비둘기 전설은 이어지게 되었다.
“일어설까요?”
“······”
그녀는 말없이 일어섰다. 우리는 동백섬 동남쪽 벼랑 위에 만든 둘레길로 들어섰다. 서로 비껴 걸을 수 있는 넓이에 나무로 만든 둘레길은 흔들거렸다. 나는 기우뚱거리는 그녀의 왼쪽 팔을 잡고 부축했다. 그녀는 얼굴을 돌려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무 둘레길을 지나 도로에 올라설 때까지 그녀를 부축하여 걸었다.
동백섬 남단 최치원 선생이 남겼다는 ‘海雲臺해운대’가 음각된 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올라 대한해협 밤바다를 보았다. 멀리 오륙도 등대 불빛이 밤바다를 비추었다. 대학생 때 ‘해운대석각’까지 내려가 바위 위 천막 횟집에서 멍게와 해삼을 먹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저 아래 해운대석각 보여요?”
“······”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저기서 멍게와 해삼을 먹었는데!”, “예······.”
그녀가 처음 한 말이었다. 석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때 7월 초에 휴교령이 내려 여름방학이 두 달이나 되었지요.”, “예.”
그녀는 처음으로 눈가에 가느다란 웃음을 지었다.
“그때 내가 해자 씨를 ‘시갈’로 불렀던 것이 기억나요?”
그녀가 답이 없었는데도 나는 또 물었다. “그날 소주에 취해 비틀거리며 벼랑을 올라올 때 내 손을 잡고 끌어주었는데.”
그녀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었다.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처음으로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는 듯 멀리 밤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그녀의 흰 머리칼을 날렸다. 저쪽 한 쌍의 젊은이 이외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 5월에 응시한 행정고등고시 재정직에 합격한 것이 발표된 것은 한 달 후 6월이었다.
고향에서 서울신문에 발표된 합격자 명단을 본 그 날 나는 그녀에게 합격 소식과 함께 부산으로 간다는 전보를 쳤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는 부산에 머물리라 생각해서였다. 우리는 그동안 연락을 끊고 있었다. 합격할 때까지 찾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도 했지만, 폐결핵에 걸린 후로는 고시에 대한 자신도 건강도 잃었기 때문에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합격도 하고 폐결핵도 거의 나았다.
나는 전보를 친 다음 날 부산으로 갔다. 자갈치시장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서면행 버스를 탔다. 초량을 지나 고관 입구에서 내려 그녀의 집으로 가는 수정동 길을 걸었다. 여름날 오후 태양은 뜨거웠다.
과연 부산에 있을까? 어떤 변화는 없었을까? 첫 말은 어떻게 할까? 2년이라는 세월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나는 그녀의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녀가 다닌 K 여고 교문이 나왔다.
K 여고 교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언젠가 그녀를 집에 데려다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가 S 의대에 떨어졌을 때 알 수 없는 충동으로 입시 공부 때 먹다가 남은 각성제를 몽땅 먹었다가 앰블란스에 실려 대학병원에 가서 깨어났다는 이야기. 다음 해 방향을 틀어 미술대학을 갔다는 것이다. 그때 진폭이 큰 그녀의 행동에 매우 놀랐다. 어느 날 그녀가 S 의대 입학원서에 붙였던 것이라며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사진을 주더니 얼마 후 그것을 빼앗듯이 되찾아 갔다. 그녀와 만나는 동안 예고도 설명도 없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순종적이었다.
나는 학교 앞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바로 받았고 나는 K 여고 교문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그날 우리는 해운대 백사장을 걸었고 동백섬 천막 횟집에서 합격 축하 맥주를 마셨다. 대한해협의 밤바다는 파도가 높게 철썩거렸다.
밤바람에 한기가 돌았다. 나는 섬 마루에 올라가겠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도로를 건너 돌계단을 올랐다. 내가 앞장서서 몇 걸음을 올라가는데 그녀가 멈추어 섰다. 힘들어 보였다. 손을 내밀자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돌계단을 올랐다. 처음으로 눈빛이 서로 정면으로 마주쳤고 처음으로 미소보다 크게 웃었다. 가파른 길에 그녀를 끌다시피 하다 보니 나도 숨이 찼다. 소나무 사이로 불빛이 쏟아졌다.
마루에 올라 벤치에 앉았다. 긴 세월에 소나무들이 크게 자라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보안등 불빛 아래 늦게 핀 동백꽃 몇 송이가 보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해 겨울방학 동백꽃 만발한 섬 마루에 올랐을 때 그녀가 동백꽃 같은 볼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녀의 볼에는 동백꽃의 홍조가 흐르고 있었다.
“옛날에 이곳에 왔던 기억이 나요?”
“예. 동백꽃이 많았는데!”
처음으로 문장으로 이루어진 말을 했다. 그녀의 눈길은 불빛에 비친 동백꽃을 확실하게 향하고 있었다.
“대학 3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2월이었던 같아요.”
“날씨가 추웠어요, 그때.”
그녀가 두 번째 문장으로 된 말을 했다.
“백사장에서 발이 파도에 빠졌던 일 기억나요? 천막을 치고 모래로 덮은 벙커 횟집에서 아나고를 먹었지요.”, “그랬어요?”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내가 오늘 여기까지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가스등 켜진 모래 벙커 횟집에서 소주에 취한 일과 파도가 높았던 일을 얘기하고, 추풍령의 「산비둘기」와 「미뇽」 이야기를 하며 그녀의 기억을 살려보려고 애썼다. 그녀는 계속해서 문장으로 된 말을 했다.
그녀의 눈에 초점이 생겼다는 것과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있었다는 것과 그녀가 문장으로 된 말을 했다는 것으로 충분한 만남이었다. 그녀의 언니 말대로라면 내가 그녀의 수명을 얼마간 연장하게 만든 것이다. 지금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로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왜 수녀가 되었는지, 밴쿠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여전히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