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인(陜川人)의 정신(精神)과 초계 의병(草溪 義兵) (1) – 안희록적중면 두방리 출신
한 國家는 그 나라의 歷史와 傳統을 소중히 하고 더욱 發展시켜 나아가기 위해 많은 努力을 합니다. 그 歷史와 傳統속에는 祖上님들의 발자취가 있고, 民族의 魂과 넋이 있으며, 그 時代의 삶의 애환(哀歡)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歷史속에는 들추어내어 본받아 기리고 싶은 이야기와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歷史의 숱 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우리가 꼭 알아야 될 歷史的 事實 임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우리 주변에는 상당히 있습니다. 陜川人의 빛나는 先祖님들의 精神을 다시 일깨워 現代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自負心을 고취하고 자기가 맡은 일을 더욱 열심히 最善을 다 할 수 있도록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心ㅁ情으로 이글을 습니다.
우리 陜川 地域은 三國時代에는 新羅와 百濟의 국경 지대였으며 6가야국 중에서는 城山가야와 고령가야의 접경지대이기도 하며 다아국 이라는 이야기 있습니다. 百濟가 新羅를 공격하여 대아성(지금의 합천읍)을 점령하고 고령 쪽으로 진격하면서 힘의 열세를 느낀 신라는 당나라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명분을 찾아 羅唐 연합군은 서기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는 서기 668년에 멸망시켜, 三國 統一을 하였으나 國土를 축소하여, 광활한 만주의 高句麗 땅과 대동강 以北 地域을 唐에 양보하는 웃지 못 할 歷史적 과오를 남겼습니다.
歷史的 기록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들, 배(엄마가 다르다는 뜻임)다른 형제의 권력과 암투와 갈등으로 인해 국력을 결집시키지 못 한데에서 온 원인이라고 합니다. 약 5000천년 역사 동안 공식적인 외침이 약930여 차례이며, 부분적인 침공(국지전)은 약2300여회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격동기적 약소국가의 비운을 민족적 웅비로 승화시키지 못한 국가적, 국민적 원인은 무엇이며, 새로운 도약의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 이 時代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 인지를 반성하는 맘으로 약 400년 전 壬辰 倭亂의 교훈과 우리고장 의병에 관한 역사를 알아 보려합니다.
1592년 4월 14일(음력) 15만 大軍을 이끌고 쳐들어와 우리 민족을 도륙한 임진왜란은 이 나라 백성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였는가를 입증한 전쟁이기도 합니다. 釜山 수영만을 통해 동래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진주 사천만 쪽으로 공격을 하려던 왜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장군등과 함께 한산도 앞바다에서 격퇴한 한산대첩의 승리로 晉州를 통해 內陸地方을 공격 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주었다 할 것입니다. (임란3 대첩 :한산, 진주, 행주)
이런 와중에 지금의 의령군 유곡면 세간이란 마을 느티나무 에 큰 북을 메어놓고 북을 처서 동민들을 모아놓고 왜놈들이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의병을 일어 킨 곽 제우나 草溪縣에서 지금의 청덕면과 적중면의 경계 산 고개인 가무실재를 넘어 당산 마을과 월막 마을 뒤를 지나 무덤 터라는 곳에서 가동을 동원하여 싸우다 전사한 安沂(안기)공과 크게 다를 봐 없다 할 것입니다.
義兵이 最初로 일어난 곳이기도 하며, 倭軍의 北上을 內陸 地方에서 최초로 차단한 地域이며, 그 후 7年 동안 戰爭을 하면서 처음 왜군들이 한번 지나간 후로는 다시는 점령 하지 못한 곳이기도 합니다. 新羅 대아성(합천읍) 竹竹 장군의 죽음은 三國 統一에 기여 했으며,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합천대병면 장단 사람으로 추정하고 성씨는 朴氏 혹은 鄭氏라는 분들도 있음))는 조선을 개국하는 지혜를 주었으며, 壬辰倭亂 당시의 陜川 人의 단합된 救國精神은 이 나라 義兵 史에 길이 빛날 金子塔(금자탑)인 것입니다.
草溪 義兵 倡義錄(창의록), 忘雨堂 곽재우 文集, 雪壑 李 大期 文集(설학 이 대기, 문집), 濯溪 全 致遠 文集(탁계 전 치원 문집), 이순신 장군의 亂中日記 등을 살펴보면 합천군 초계현의 의병장 설학(雪壑) 이 대기公이시고 야로현의 義兵將 萊菴 鄭 仁弘장군과, 의령지역 의병장 忘雨堂, 郭 再祐 將軍 입니다.
망우당 곽 제우, 紅義 將軍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고, 광해군(임금)당시 鄭仁弘은 大北派의 巨頭로서 영의정 까지 지내셨다는 歷史的 기록이 있습니다. 광해군과 정인홍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학설과 주장을 달리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여기에서는 필자의 개인적 사견을 論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란 당시 조정은 외침을 대비하지 못 하고 당파 싸움만을 심하게 했다고 歷史는 말 하고 있습니다. 1592년 4월 14일(음력) 釜山의 東來 城 주위의 전투와 다대포 지역의 전투가 아주 치열 했다는 사실입니다. 동래부사 송상현과 다대포 첨사 윤흥신 등은 민관이 모두 장열하게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과 동래부사 등 관리들은 일본이 쳐 들어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부산 동래성이 유린하고 20일 후에 조선의 한양이 일본군의 말발굽 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당시의 관료사회가 얼마나 국방에 관해 문제가 허술하였는지 짐작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선조임금은 비오는 밤중에 신하들과 의주로 도망가기 바빴다고 합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파당으로 민심을 규합하지 못 하고 이간질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1차로 왜구가 한번 국토를 유린당하고 난 뒤에 각 지역의 백성들과 유림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 시작 했고 그 중에서도 의령군 부림면 세간의 곽재우公이 일으킨 의병과 草溪 의병 이 대기公등을 비롯한 지역의 유림들에 의해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힘을 모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歷史 기록에서는 초계의병과 이대기장군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서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2, 歷史的으로 소외된 초계 義兵 史의 실상은…
물론 요즘 陜川郡에서 지역 유지님들께서 힘을 모아 壬辰 倭亂 史 記念 事業 設立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하나 많은 연구를 하시어 올 바르게 임란 義兵 史를 정리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당시의 상황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여 볼 때 초계 현 義兵의 주체들과 中央 정부 관리들과의 학맥이나 黨派가 달랐지 아니 했던가를 추정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의 개국 이념은 유교에 근본을 두고 주자학을 발전시키면서 안향의 6제자( 號(호): 菊齋(국재) 권부, 易東(역동)우탁 ,彛齋(이재) 백이정, 東庵(동암) 이진, 梅雲堂(매운당) 이조년, 德齋(덕재) 신천)분들의 제자들에 의해 발전하여 조선조 개국의 주체는 권부 선생의 제자 분들에 의해 주축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제자인 이곡, 이인복, 백문보, 이제현등이 그의 문하생이고 이곡선생의 아들, 이색이 있으며 이곡의 제자는 정몽주, 이숭인, 전도전, 박상충, 윤소종, 권근 등이 그 문하생이었습니다.
조선조에 들어와 권근선생에게 수학하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의 순으로 전수되었습니다. 이런 學脈이 조선 중기이후 파당으로 발전하여 남인, 북인에서 노론, 소론 등으로 분당되고 영남학파를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합천과 서부 경남에는 남명 曺 植선생의 학풍을 계승했다고 判斷 됩니다. 그동안 性理學은 仁과 禮(질서입니다)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되었습니다. 仁의 (뜻 속에는 용서와 베푼다는 의미가 함축되어있습니다.) 멋을 도외시한 정치적 學文으로 변질된 원인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명선생은 儒學의 바탕을 理論과 實踐에 있다고 주장하시면서 行動하는 倫理, 실천하는 性理學을 강조 하셨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儒生들은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義兵에 참여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곽재우, 김천일, 조헌, 정문부, 이대기, 정인홍장군과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곽재우 將軍또한 임난 후 兵曹判書로 제수 되었나 벼슬을 사양하고 草野에서 自然을 벗 삼아 친구들과 時와 道를 論하면서 生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특히 이순신 將軍이나, 망우당 곽재우 將軍등은 해방 후(1945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 후 1961년 5,16혁명의 주체인 朴 正熙 大統領 時代에 와서야 歷史的 英雄으로 탄생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 草溪지역의 義兵 將이신 雪 壑 李 大期장군도 그런 부류의 분들이시지 않는가 하는 판단입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