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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문화원 역사문화 탐방을 다녀와서 – 옥철호 前 삼가면장

지역 문화 창달을 위해 노고가 많으신 문화원 회원 350여 명과 함께 지난 7월 6일, 7일 이틀간 10여 대의 버스를 나눠 타고 일제 강점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 기념관과 독립기념관을 탐방하고 돌아왔다.
지역의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살고 미래가 있다는 말이 있다.
필자도 지역 문화 활동에 참여코자 2년전 합천문화원 회원으로 가입하여 이번 문화탐방에 참여하게 되었고 삼가면,가회면회원 35명과 함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6시 버스로 가회면을 출발, 삼가면을 경유해서 07:30분 집결지인 고령휴게소에 제일먼저 도착했다.
버스 10대가 모두 집결할 무렵 김윤철 군수님과 군의원, 관계공무원들도 이른 아침시간 고령까지 오셔서 문화원 가족을 환송해 주셨다.
버스로 장시간 달려 오전 11시경 천안시 유관순열사 기념관에 도착했는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유관순 열사상이 제일먼저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그리고 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각과 기념관, 순국소녀 봉안 기념비등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열사의 생가가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16일생으로 어린시절 총명하고 당찬 아이였으며 활발하고 명량한 성격, 따뜻한 다정한 마음씨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좋아 했으며 도리에 어긋나면 자기뜻을 굽히지 않는 당당함을 보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열사는 이화여자보통학교 1학년때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학교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에 체포 되었다.
체포된 열사는 “우리가 뭘 잘못해서 잡혀 온거죠 잘못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일본에 있는거 아니가요”라고 당당하게 항의했다.
그후 열사는 이화학당 교장의 도음으로 풀려났지만 일본이 3,10일 학교 휴교령을 내리자 교향행 기차를 타게 되고 고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수천명이 몰려든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 하다 4,1일 체포 되었다.
투옥후 일본헌병의 갖은 악행에도 굴하지 않고 밤낮없이 옥중투쟁을 계속하던 유관순 열사는 계속된 고문의 휴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처녀의 몸으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우리의 영원한 별이 되어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곧바로 독립 기념관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기념관의 상징인 겨레의 탑이 양손을 들어 환영하는 듯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겨레의 탑은 한민족의 기상과 자주독립과 번영에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독립기념관에는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제1관부터 6관까지 전시관이 있었다.
일본의 명성황우 시해 만행, 을사늑약, 그리고 식민지배의 시작과 독립투사들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알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요인물과 조선청년독립단의 활동사항,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등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사진과 기록등 8,15해방에 이르기까지 활동사항을 보다 더 상세히 알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31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의사가 남긴 “위국 헌신 군인 본분(爲國 獻身 軍人 本分) 즉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라는 친필 휘호를 보니 가슴이 찡하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처형전 마지막으로 남긴말이 유명하다 “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 仁人 殺身 成人) 즉 높는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그 어머니와 그 아들이란 생각을 해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이번 역사문화 탐방을 통해 우리 합천 문화원 가족 모두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움이 닥쳤을때 유관순열사나 안중근의사등 수많은 애국지사들 처럼 기꺼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가질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했을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