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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풍류의 바다 – 임장섭前 합천교육장

나는 바다에 빠져있다. 그것도 깊숙이 말이다. 물이 많고 깊음에도 두렵거나 벗어나고픈 마음이 없다. 그저 즐거워할 뿐이다. 풍류의 바다가 내게 운명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시조창에 입문한 것은 1984년도다. 시조창은 정가(시조, 가사, 가곡)의 한 장르다. 그해 3월 통영 사량중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내륙지방에 살다가 사방이 바다인 섬 생활이 시작되었다. 밤낮을 둘러봐도 창망(滄茫)한 바다다. 섬이 풍기는 갯내에 익숙도 하기 전이었다. 봄 아지랑이 피는 어느 날 김장옥 선생이 내게 시조창을 하자고 했다.
김 선생님은 성실한 사람으로 다가왔고 얼굴은 검고 활력이 넘쳤다. 그 무렵 TV 드라마에 킨타쿤테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런 영향으로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킨타쿤테라고 불렀다. 개성과 멋이 있는 호칭이었다. 그와 나는 아침이면 산에 올라 발성 연습을 했다. 아 에 이 오 우를 목청껏 질렸다. 가슴이 뚫리고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까마득히 보이는 삼천포 화력발전소가 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며 위안을 주었다.
방학이면 진주 향교에서 공부를 했다. 수강생의 나이와 직업도 다양했다. 공부방에 들어가면 예(禮)가 우선이라며 누구든 큰 절로 인사를 하는 게 불문율로 지켜졌다. 인품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도 있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온종일 공부를 하였다. 오전에 한두 시간 선생님께 지도를 받고 나면 그 후로는 먼저 익힌 이에게서 배웠다. 자연스레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지도는 구자명, 장남기 선생이 맡고 있었는데 역할이 각기 달랐다. 구 선생은 이론에 중점을 두고 단체를 관리하는 분이셨고 장 선생은 영락없는 풍류객이었다. 소리가 뛰어나서 그가 남창질음(男唱叱音)으로 ‘푸른 산중’을 부르실 때는 저런 소리도 있나 할 만큼 경이로웠다. 거주지가 하동인데도 몇 날이고 진주에 머무는 것으로 봐 열정이 대단하였다. 그는 몸으로 지도하셔서 존경받는 스승이셨다,
교원사회에서는 교원예능경진대회가 있다. 배우는 첫해에 긴장감을 안고 출전을 했는데 어설픈 실력이라 떨어졌다. 열심히 노력하여 이듬해는 3등을 했다. 비록 상금은 없어도 상을 받았다는 자부심은 1등 못지않았다. 3등을 3회, 2등을 2회 하다가 출전한 지 6년이 되는 해에 1등을 하였다. 한 분야에서 1등을 하면 그 분야는 출전을 못 하는 규정이 있다. 학생에게 시험이 없으면 공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도 더는 진도를 내지 않으니까 시조창은 차츰 잊혀갔다.
세월은 멈춰 주지 않았고 오고야 마는 퇴직을 덜컥 맞이하게 됐다. 퇴직을 남의 일같이 생각했던 터라 별 준비 없이 온몸을 바친 직장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양복도 입지 않고 매일 출근할 일 없으니 괜찮은 듯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딱히 할 일도 갈 데도 없었다. 집안에 눌러있으니 아내의 눈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도 삼시 세끼 챙기는 일이 아내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2010년 11월, 아내가 안과 진료를 받기 위해 진주 가는 길을 따라나섰다. 현직에 있을 때 나를 찾아주던 사람이 생각나서 진료가 끝나자 전화했다. 그는 꾸준히 시조를 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진 실력자가 되어있었다. 그를 만나 진주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만남이 시조창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묵혀버린 나의 시조창 실력은 초라했다. 한동안 갈등했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도 없지 않은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녹음기를 준비하고 시조 공부를 했다. 이전에 배웠던 것은 세월에 묻혀버렸고 바닥에서부터 배울 수밖에 없었다. 거의 매일 진주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회원들이 가는 산악회 모임도 따라가고 몇 사람이 모이는 야외 행사에도 빠지지 않았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던가. 그 일에 미쳐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대회란 대회는 죄다 다니며 2년간 6단계의 과정을 해냈다. 국창부를 졸업하고 2014년 11월에 대상부 장원을 했다. 그해 받은 상금이 세무서에 신고할 정도였으니 적잖은 금액이었다. 이 과정까지 오면서 떨어진 일도 많고 경연 순간마다 긴장되고 불안해서 화장실도 많이 들락거렸다. 우황청심환은 얼마나 먹고 물은 얼마나 마셨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막상 7단계의 과정을 거치고 무료해질 무렵에 합천에서 뜻있는 분들이 시조창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2015년 3월 (사)대한시조협회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아 10월16일에 개강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재미를 더해갔다. 수업일지를 썼다. 누가 나오고 무슨 공부를 했고 질문내용도 기록으로 남겼다. 결석하는 사유와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상을 받은 일도 기록해두니 나름대로 좋은 자료가 되었다.
2016년 12월에 첫 발표회를 하기로 했다. 11월에 행사를 어떻게 하는가를 관찰하려고 구미대회에 회원들이 출전했다. 마침 문화원에서 차를 제공해주니 고마웠다.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건 힘이 되는 일이다. 18명의 회원이 무대에 오르는 순간 가슴이 벅차 울컥하였다. 우리 회원들이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때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많은 동호인이 적잖게 놀라워했다. 합천에도 시조를 하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다면서 말이다.
시조창은 많은 추억을 안겨줬다. 대장경 축전 때에는 대행업체와 계약을 맺고 가야산 농산정에서 10일간 공연했다. 홍류동 계곡, 경치 좋은 곳 최치원 선생이 신라 말엽에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시를 읊던 곳 아닌가. 오전과 오후 2회씩 공연을 했다. 많은 사람이 관심 가져주었다. 외국인들은 낯선 문화에도 큰 관심을 두었다. 공연 광경을 촬영하고 우리와 기념사진을 찍고 손을 치켜세워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동호인과 10일간 호흡을 같이한다는 건 그만큼 정을 쌓는 일이다. 행사가 끝나 헤어질 때의 아쉬움은 컸다. 최치원 선생도 우리 공연을 끝까지 들으며 함께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많은 행사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통영한산대첩축제, 보은대추축제, 포항행사 등 모두를 나열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제주행사가 오래 기억된다. 2박 3일 일정에 합창단원과 그 가족까지 함께 가게 되어 인원수가 만만치 않았다. 가게 일을 미뤄두고 부부가 함께하기도 했다. 귀가 전날 밤 해안가 카페에서의 추억은 지금도 감회가 새롭다. ‘위하여’를 얼마나 많이 외친 화합의 장이 되었던가.
시조를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양산대회에서 만난 정연옥 할머니다. 98세의 나이로 고급부인 명인부에 도전하셨다.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성주대회에 참가한 진상민 노인도 있다. 94세에 손자 손녀가 소속하는 합창단에서 일원으로 활동하셨다. 이분들은 숨 그릇을 크게 해 주는 느림의 미학 덕분에 나이를 잊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지회의 회원 강인수 훈장님도 고마운 분이다. 개강한 이래 지금까지 참여하신다. 꾸준히 하시니 성과도 있다. 전국대회 평시조부와 사설시조부에서 장원을 하였다. 적수천석(滴水穿石),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은 그분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는 우리 회원들에게는 큰 어른이시다.
그뿐이겠는가. 공자를 만났다. 시조를 하기 전까지는 그분은 도덕적이고 학문에 뛰어난 인물로만 알았다. 그는 음악에도 대단한 철학과 노력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중국 제나라의 순임금이 만든 소(韶) 음악을 접할 때는 3개월간이나 고기 맛을 몰랐다고 하니 얼마나 몰입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분은 ‘소리를 알고 음을 모르면 짐승과 같다’라고 했고 ‘음악이 세상을 조화롭게 한다’라며 ‘오로지 군자라야 악(樂)을 알 수있다(唯君子爲能知樂)’고 하지 않았던가. 향교에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를 지낸다. 진정 그분을 존경하고 따른다면 그가 즐겼던 음악에 심취하는 멋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시조창을 하다 보니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7호 이수자가 됐다. 서울을 오가면서 3년간의 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른 결과다. 재능이 부족해 1년을 재수하고 합격하였다. 작년 오월에는 국악 분야 예술인활동증명 확인서도 획득했다. 예술인으로 활동해도 자격이 된다는 의미다.
내게 음악은 어둠을 밝혀주는 달빛이다. 풍류의 바다에서 혼자 즐길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할 의무감이 생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봉사에 여생을 바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