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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고향에서 사는 행복 (1) – 이호석 수필가

내가 사는 마을은 합천읍 소재지에서 대구로 가는 국도를 따라 2킬로미터쯤 떨어진 농촌 마을이다. 한때는 90여 세대에 300여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지금은 70여 세대에 180여 명이 살고 있다.
나는 읍 소재지에서 태어났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때부터 이곳에 살면서 20대 초반 군 생활을 한 5여 년간을 제외하고 칠십 평생을 여기서 산다.
마을 앞 국도가 지나가는 야트막한 산 너머에 바로 넓은 황강이 굽이쳐 흐른다. 1988년 합천댐이 건설되기 전 황강은 여름철이면 몇 차례씩 검붉은 황토물이 강변의 모든 것을 쓸어버렸고, 주변 들판의 농작물과 저지대 주민들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높은 파도처럼 휘감아 돌며 쏟아져 내려가는 황토물을 보면서 심한 어지러움과 공포감에 떨기도 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물과 넓은 백사장은 언제 그런 패악질을 했느냐는 듯이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와 금방 친숙해진다. 여름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맑고 시원한 강물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동대들끼리 모여 곳곳에서 멱을 감는 대중목욕탕이 되었고, 백사장은 우리가 마음껏 뛰노는 운동장이 된다. 마을 청소년과 청년들은 시간만 나면 백사장으로 뛰어나와 뜀박질도 하고 씨름도 하고, 수영도 하면서 호연지기를 키웠다.
마을 뒤 산골짜기를 따라 저절로 만들어진 작은 도랑은 마을을 가로질러 황강으로 흘러든다. 도랑에는 여름 홍수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맑은 물이 졸졸 흐르며 마을 주민들과 함께했다. 매일 아침이면 주민들에게 세수 물이 되었고, 낮이면 곳곳이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되면서, 마을 주민들의 모든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젖줄 역할을 하였다.
도랑을 따라 골짜기로 3,4백 미터쯤 올라가면 남쪽으로는 ‘황새등’이라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우뚝 서 있고, 북쪽으로는 ‘메네미’라는 산이 황새등과 어깨를 겨루며 버텨 서 있다. 이 산들의 뒤쪽으로 조금 낮은 산등성이가 이 두 산을 연결하고 있다. 산등성이 너머에는 폭 백 미터가 채 안 되는 ‘합천천’이 흐르고 있다. 그리 큰 하천은 아니지만 주변 곳곳에 제법 넓은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고, 군데군데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나는 어릴 적, 소 먹이러 뒷산으로 갈 때면 이 산등성에서 합천천 건너 겹겹이 보이는 아득한 산들을 바라보며 저 산골짜기들에는 어떤 마을이 있을까. 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항상 궁금하였다.
내가 스물다섯 살부터 고향인 이 고장에서 면서기로 근무하면서 그 골짜기들의 신비가 하나둘 벗겨졌다. 골골이 출장을 다니면서 궁금했던 마을, 궁금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초가집들이 군데군데 크고 작은 무리로 마을을 이루고 있고, 순진하고 인정 많은 농촌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공직에 입문하고 조금 으쓱한 기분이었지만, 고향 마을마다 출장을 나가보니 동갑 친구들은 물론 선친과 삼촌 친구, 형님 동생 친구들이 곳곳에 살고 있어 으쓱한 기분을 접어놓고 항상 언행을 조심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했다.
당시 농촌 면서기들은 매일같이 이 마을 저 마을로 비포장 자갈길을 따라 자전거나 싸이카를 타고 출장을 다녔다. 각종 공과금을 직접 받아와야하고 모내기철에는 모도 같이 심고, 보리, 벼 베는 시기가 되면 이 일도 거들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매일 오가는 자갈길 출장이 힘들기도 하였지만, 봄이면 푸른 들판과 산골짜기마다 만발한 진달래꽃이 발걸음을 가볍게 하였고, 가을이면 황금빛 들판과 단풍으로 단장한 골짜기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거기다가 인심 좋은 주민들이 모두 가족처럼 대해주니 힘든 줄 모르고 공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
25여 년간을 함께 한 그 마을들과 그 사람들을 항상 잊지 못한다. 공직을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울 때면 혼자 차를 몰고 그 마을들을 돌아본다. 그러나 면서기 시절 반갑게 맞아주시던 어른들께서는 대부분 돌아가셨는지 찾아뵐 수가 없어 허전한 마음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며 돌아오곤 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