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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사는 행복 (2) – 이호석 수필가

청소년 시절 마을 주변 산들은 모두 민둥산이었다. 그때는 농촌의 땔감이 나무였기 때문에 산에 큰 나무들이 남아있지를 않았다. 겨우 보득솔이 띄엄띄엄 있고 그 사이로 풀들이 무성하여 소먹이기에 좋았다. 당시 소는 농가의 살림 밑천이라고 할 만큼 중히 여겼고, 마을 집집이 한두 마리씩을 길렀다.
뒷산은 이른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소먹이 바탕이었다. 매일 오후가 되면 소먹이는 아이들과 소들이 함께 어울려 뒷산의 품 안에서 뛰놀았다. 우리들은 소를 풀어놓고 오후 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주위에 어둠 사리가 들고 읍 소재지에 전깃불이 반짝반짝 들어오기 시작하면 부랴부랴 각자의 소를 챙겨 몰고 황새등 줄기 비탈길을 허겁지겁 내려왔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해 질 무렵 ‘황새등’ 만당에 올라서서 읍 소재지에 켜지는 전깃불을 볼 때면 너무 부러웠다.
1970년대 이전에는 마을 앞 국도가 자갈길이었고 겨우 하루 몇 차례씩 자동차가 뽀얀 먼지를 날리며 지나다녔다. 인근 논밭의 곡식은 물론 도로변의 집들도 모두 먼지투성이다. 도로변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차가 지나가면 먼지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안개가 지나가듯 참아야 했다. 이렇듯 마을 주변 강과 산, 모든 자연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준 광활한 무대였다.
2023년 가을이 짙어가는 계절이다. 정말 오랜만에 마을 뒷산을 오른다. 가까운 뒷산임에도 이 산을 오른 지 벌써 6,7년은 지났지 싶다. 마을 앞 황강변에 체육공원이 조성되고, 또 나이가 들다 보니 자연히 멀어진 것이다. 소싯적에는 매일 같이 오르내리든 뒷산과 마치 절교라도 한 듯 수년 동안 냉정하게 외면하다가 오늘에야 오르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황새등’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며 어릴 적 추억 속의 풍경들을 불러내며 현실과 대질해 본다. 모든 게 너무나 많이 변했다. 격세지감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발전적 변화에 대한 작은 자랑스러움과 기대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어진 풍경에 이방인이 된 것 같아 외로움이 엄습한다.
읍 소재지가 눈 아래로 들어온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시가지가 모두 비포장 도로였고, 도로 옆마다 가정에서 흘러나온 오수들이 모여 흐르는 하수구가 복개되지 않아 아주 불결했다. 또 시가지 중심지에 겨우 2,3층 건물 몇 채와 단층 양옥들이 있었고, 변두리에는 초가집들이 즐비했다. 그랬던 읍 소재지가 지금은 골목길까지 말끔히 포장되었고, 하수구도 모두 정비되어 시가지가 너무나 깨끗해졌다. 또 곳곳에 높은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리하고 있어 제법 도시 스럽다.
우리 마을을 내려다본다. 초가집이 옹기종기 엉겨있던 마을이 모두 양옥으로 바뀌었고, 소규모 빌라 두동과 요양병원, 변전소 등이 들어서 있어 아늑하고 정겹던 옛 마을 모습이 아니다. 도시도 농촌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과 인적이 드문 마을 풍경이 내 마음을 서먹하고 쓸쓸하게 한다. 모처럼 오른 뒷산, 반가움보다 세월의 빠름을 아쉬워하며 내려왔다.
언제인가 마을 앞 국도는 물론 마을 안길까지 모두 깨끗이 포장되어 있고, 기존 국도 옆으로 새로 건설된 왕복 4차선 국도가 시원히 뚫려 있다. 그 위를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가 줄을 잇는다. 어린 시절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풍경들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란 생각에 새삼 감탄을 한다.
마을 앞 황강 백사장은 공원으로 변해있고 마을 주변 민둥산은 하늘을 찌르는 큰 나무들이 밀림처럼 우거져 있다. 봄이면 양지바른 들녘이나 보리밭에서 나물 캐던 아가씨들의 정겨운 모습과 마을 청년들이 나무지게에 진달래꽃을 꽂고 너울거리며 메네미 산을 넘어 줄레줄레 마을로 내려오던 모습은 모두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상전벽해의 변화를 실감한다.
나는 한때 도시로 나가 성공한 사람들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평생 고향에서 우물 안 개구리 삶을 사는 것이란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나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 고향에서 공직 생활을 하면서 항상 지역 주민들과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었고, 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던 게 너무 만족스러웠다.
고향 마을에서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절인 이웃들과 평생을 함께하면서 언제든지 어릴 적 아름다운 추억들을 생생하게 상기할 수 있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또 지역 사회에서 매일 같이 친구들과 어울리고, 수시로 선후배들을 만나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누는 것도 객지에서 느낄 수 없는 소소한 행복이다. 나는 이러한 행복들에 항상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