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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 마음의 유영(遊泳) – 이호석 수필가

내 마음은 수시로 흔들린다.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일엽편주와 같다. 나이 70대 후반에 들면서 친구들과 인생사 얘기를 할 적마다 나는 지금이 아무런 걱정 없이 가장 행복한 때라며 어떠한 아픔과 죽음이 닥쳐와도 웃으며 맞이하겠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3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위암으로 72세에 돌아가셨다. 당시 대구 가톨릭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가족들 보는 앞에서는 크게 아픈 기색을 하지 않으셨다. 항상 “괜찮다”라고 하시다가 편한 표정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아버지가 가족들의 불안한 마음을 덜어주려고 아픔을 참고 또 참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이 되면서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또 하나는 공직 생활을 무사히 마친 후 〈합천읍지〉 〈합천이 낳은 인물〉 편집 등 지역 일에도, 또 나의 선대 시조 다음 2세~9세까지 실묘(失墓)된 선조 64위의 제단비 설립과 〈합천이씨 역사 요람〉 발간 등 종사(宗事)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언제나 앞장서 마무리 하였다. 또 가정적으로도 아들 셋이 모두 결혼하여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며 손자들까지 두었으니, 자식에 대한 걱정도 없다. 그러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될 일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초, 읍 소재지에 있는 바른 윤 내과 병원에서 위(胃)와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며칠 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자녀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단번에 ‘내 몸 어딘가에 큰 탈이 났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수원에서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큰며느리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윤 내과에서 며느리와 내시경 검사 결과를 주고받으며 설명을 한 모양이다. 며느리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것 아니라고 안심을 시킨 후 설명을 한다. 위(胃) 상위 부분에 암이 조금 자리 잡고 있어 수술을 해야 한다며 요즘은 의술이 발달하여 쉽게 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전화를 받고 나는 지금 아무런 증상도 없으니 그저 두어도 2~3년은 괜찮을 것 같다며 여든은 넘길 수 있으니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조금 후 아들 삼 형제가 번째로 전화가 왔다. 이번에만 수술하고 다음에 이상이 있을 때는 수술을 하지 말자며 달랜다.
이튿날 대구에 사는 막내가 당장 직장에서 휴가를 내고 찾아와 어쩔 수 없이 함께 칠곡 경북대학교병원으로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았다. 역시 결과는 합천 윤 내과와 같았다. 12월 29일 수술 날을 잡고 하루 전인 28일에 약 일주일 정도 입원할 준비를 해서 오라고 하였다. 다행히 수술할 의사가 위(胃) 수술에 명성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란다. 옆 지인들은 서울 큰 병원으로 갈 것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의사에 대한 믿음도 가고 또 수술 후 외래진료 다닐 생각을 하여 이곳에서 수술하기로 하였다.
12월 28일 오전 세면도구와 양말, 속옷 등을 대충 챙겨 칠곡 병원에 도착하여 입원 소속을 밟았다. 내부를 돌아보니 대단히 큰 병원이다. 입원 병실은 6동 10층 24호 5인 실이다. 5인실이지만 실내가 넓고 개별로 칸막이 커튼이 완벽히 쳐져 있어 불편함은 별로 없다. 오히려 동병상련의 환자들과 금방 친해지면서 경험과 도움말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점도 있었다. 특히 내 자리는 창문 옆이라 멀리 팔공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50사단 군부대와 앞 큰 도로에 왕래하는 자동차도 볼 수 있어, 그렇게 갑갑하지 않았다.
29일 오전 8시가 수술 예정 시간이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니 약간의 무서움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아침 7시 30분이 되니 남자 간호사 두 명이 철재 이동식 침대를 끌고 병실로 들어온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가운을 쓴 후 그 침대로 옮겨 누었다. 그때부터는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병실을 나가 복도를 따라 이리저리 가다가 승강기를 타고 어디론가 한참 내려가는 것 같았다. 마치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는 그런 묘한 기분이었다. 3층 수술실에 닿은 것 같다. 옆에 나와 같은 시간에 수술할 사람들이 여럿인 모양이다. 웅성웅성 얘기 소리가 들리지만, 도살장안 같은 기분이라 옆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한다. 전신 마취에서 아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차라리 그대로 죽으면 덧없이 편안한 죽음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주위가 소란하다. 한편에서는 “아이고, 아이고” 아픔을 참지 못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누군가가 나를 흔들며 내 이름을 여러 차례 묻는다. 내가 이름을 말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가 나가지 않는지 자꾸 묻는다.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말을 어눌하게 주고받는다. 나는 지금 몇 시냐? 라고, 물었다. 오후 한 시 반이란다. 수술에 네 시간이 걸렸고 회복에 한 시간이 좀 더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위는 상부 약 30% 정도를 절제하였다고 했다.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비몽사몽간에 나의 병실로 실려 왔다. 머리맡 폴대에는 대여섯 개의 약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끝은 모두 내 팔에 꽂혀있는 주삿바늘이었다. 몸에는 소변과 수술부위에 고여 있는 피를 받는 봉지 등 세 개가 달려있다. 평소 병원을 찾을 때 이런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 저 사람은 대체 무슨 큰 수술을 하였기에 저렇게 많은 약봉지를 달고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동정이 가면서도 솔직히 보기는 좋지 않았다. 지금 내가 그 몰골이 된 것이다.
수술을 한 날은 마취가 덜 깨서 그런지 오히려 크게 아픈 줄을 몰랐다. 이튿날과 사흗날 아침에는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마치 열 길 낭떠러지기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온몸이 아프고 무기력했다. 이런 고통은 난생 처음 이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아픔을 호소하지만, 부지런히 걷는 것 외 아무런 조처를 할 수 없다며 일어나 걷기 운동을 하라고 닦달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수시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승강기를 타고 사람들이 덜 다니는 지하 1층 복도로 내려가 걷기 운동을 하였다.
수술 날과 이튿날은 아예 금식으로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 사흘, 나흘째는 미음이라며 쌀뜨물 같은 물만 조금씩 나왔고, 5일째부터 소량의 죽이 나와 조금씩 먹기 시작하였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폴대에 걸려있던 약봉지도 하나씩 줄어들었다. 수술 후 7일째 되는 날 퇴원을 하란다. 나는 너무 기력이 없고 마음이 불안하여서 한 이틀 더 몸을 다진 후 퇴원하겠다고 하여 승낙을 받고 꼭 열흘 만에 퇴원을 했다. 평소 아픔과 죽음을 웃으며 맞이하겠다던 생각은 잠시 떨쳐버리고,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은 기분으로 건강을 다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