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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진 술잔 – 문경자 수필가

모두들 바쁜 일상속에서 약속을 잡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떨어져 사는 가족들도 무슨 날이나 돌아와야 겨우 만남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 내야 모임도 할 수 있다. 특별히 무슨 이름을 지어 모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고 싶을 때 누군가 먼저 연락을 하면 된다. 오래전부터 만나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문자를 주고받아 11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송년회를 하자고 했다. 2호선 전철역 가까운 곳에 P식당을 정했다. 오후 2시 늦은 점심이라 집에서 밥을 먹고 가기는 그렇고 배고픔을 꾹 참았다. 가까운 거리라 걸어서 갔다. 가는 길에 바람은 약간 불지만 추운 날씨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플라타너스 잎이 갑자기 내 앞에서 툭 떨어져 깜짝 놀랐다. 동네 우체국을 지나 신호등을 건넜다. 식당 간판이 보여 들어갔더니 내가 일등으로 약속장소에 도착하였다.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구수한 고기냄새가 났다. 몇몇 손님들이 고기를 굽거나, 이야기를 하고, 셀프로 반찬을 나르기도 하였다. 남자들이 4명 모여서 술잔을 채우고, ‘위하여’하며 술 마시는 것을 보고, 술을 먹지 못하는 나는 만날 때마다 걱정이 되었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해주니 그저 고맙다.
맥주 한 잔을 철철 넘치게 채워서 한번에 마셔볼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해보았다. 알바 아주머니는 반찬들을 구색 맞게 가지런하게 놓았다. 심심해서 앞에 놓인 반찬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상추, 콩나물, 대파무침, 청양고추, 배추김치, 두부가 들어간 된장 찌개, 상추 겉절이, 납작하게 썬 마늘, 둥글게 썬 구워 먹는 양파, 가늘게 썬 양파 소스 등 다양하다. 고급스러운 반찬은 아니지만 모임에 와서 먹으면 정말 맛있다. 기다리다 보니 문 앞으로 눈길이 갔다. 손을 흔들며 거의 비슷한 시간에 맞추어 왔다. 메뉴를 정하는데, 3명 테이블은 소 한 마리, 2명 테이블은 소 반 마리를 시켰다. 소의 부위별로 도마위에 올려져 나왔다. 5명이라 그렇게 시키지 않으면 식당주인에게 눈치가 보였다. 달궈진 불판에 먼저 돌돌 말린 차돌박이를 구웠다. 얇아 금방 쭉 펴진 것을 손잡이가 빨간 가위를 오른손에 잡고, 집게를 왼손에 잡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금방 익은 것을 상추에 싸서 먹었다. 꿀맛이네. 고기를 굽는 정이는 바쁘게 뒤집어 타지 않게 열심히 구웠다. “고기만 굽지 말고 먹으면서 구워요.”하고 나는 눈치를 보며 먹는 데만 열중하였다. 두꺼운 살코기도 잘 구워 영양보충을 한다며 상추에 싸서 냠냠 맛있게 먹는데 뭔가 빠진 것 같았다.
그때 순이가 술이 빠졌네 했다. “여기요 맥주 2병 주세요”하고 주문을 하였다. 술 잔을 들고 맥주를 두 병 가지고 오는 알바 아주머니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맥주잔을 각자 앞에 놓았다. 서로 부어주면서 잔을 가득 채웠다. 제일 먼저 왔으니 나보고 건배사를 하라고 했다. 얼떨결에 ‘우리 모임을 위하여’하고 난 후 잔만 부딪히고, 모기만한 소리로 ‘위하여’했다. 한 명도 웃지 않고,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부끄럽고 겸연쩍었다. 술도 못 먹으면서 건배사를 한 내가 우스웠다. 다음에는 시키지 않겠지! 스스로 위로를 하였다. 연말이라 건배사도 유행에 맞는 것을 몇 개는 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우는 것도 머리가 나빠 실수를 할 수가 있다. 내가 쓴 시 한 줄도 외우지 못해 시 수업 선생님께 혼이 난 적도 많았다. 그래도 그날은 꼭 외워야 한다고 다짐을 하지만, 그 다음 날이면 다 까먹었다. 한번은 고향 향우회 각 면 회장단 모임에서 있었던 건배사다. 17명에서 몇 분의 회장이 빠졌다. 좌로부터 차례로 건배제의를 하였다. 오른쪽 마지막에 내 차례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외워 둔 건배사를 찾아 내는데 앞 글자는 알고, 뒤에만 알고, 끝에만 아는 것뿐이라 걱정이 되었다. 건배를 하는데 술잔을 들고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도 모두 힘이 드는지 ‘짧게 해요’하며 웃었다. 술을 잘 마시는 회장들은 그때마다 잔을 채웠다. 나는 속으로 술을 마시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 하고, 못 먹는 술을 들고 있으니 옆에 분이 “마셔요”했다. 술을 아예 못한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내 차례가 되었다. 문학회 송년회에서 K선생이 알려준 건배사가 가물가물 생각은 나지만 완전하게 외워지지 않았다.
여성회장이 혼자라서 내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속으로 ‘문경자 할 수 있어’ 하고 자신 있게 일어났다. ‘소 취 하’ 하고 그 다음은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누군가 뒤에 말을 알려주었다. ‘당 취 평’이라 했다. 나는 뜻을 알려주었다. ‘소 취 하’는 소주에 취하면 하루가 즐겁고, ‘당 취 평’은 당신에게 취하면 평생이 즐겁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건배사다. 조금 부끄럽기도 해서 핸드폰에 저장해둔 시를 하나 낭독했다. 근데 또 J라는 회장이 안 보고 줄줄 외웠다. “문 회장 내가 시를 하나 했는데 뭐 괜찮지”하며 말했다. 술잔을 채우고 겨우 건배사는 마쳤다. 그냥 쉽게 ‘향우회를 위하여’ 했으면 깔끔하게 끝이 났을 텐데, 남보다 더 튀어 보겠다는 마음이 실패로 돌아가 이제는 쉬운 것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연말에는 모두 술을 술잔에 채우고 기쁨도 함께 하면 좋을 것이다.
평소와는 달리 술을 많이 먹지 않았다. 순영이는 오늘 술이 잘 안 넘어 간다고 했다. 몸살이 났는지 지금 상태가 조금 걱정이 된다며 차를 가지고 와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지난해보다는 술이 줄었고, 먹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는 말을 합창하듯이 하였다. 송년회라 술잔을 각자 채웠다. 감정과 추억을 섞어 가며 바글바글 거품이 있는 잔을 들어‘위하여’하고 술잔을 부딪혔다. 술을 먹지 못하고 들었다 놓았다 하니 재미도 없다고 했다. 연말에는 술 한 잔하고 그래야 분위기가 살아난다. 한 모금이라도 하라는 말에 나도 한 모금을 마셨다.
고기를 먹었으니 차라도 한잔 마시자 했다. 오케이 하고 승용차를 타고 서서울 공원 쪽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찻집에 가기 전 소화를 시키자 하며, 서서울 호수공원을 걸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고 있는데,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중년의 아주머니가 사람들이 걷고 있는 틈새로 지나갔다. 호수에 비친 주위에 밤 경관이 잘 어울려 좋았다. 찻집으로 들어갔다. 새로 생긴 찻집이라 3층까지 있는데 크고 넓은 분위기가 송년회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2층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단것은 몸에 해롭다”는 말을 하였다. 카모마일 3명, 1명은 생 딸기 주스, 1명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술 건배사만 하는 게 아니라, 채워진 찻잔을 부딪히며 “건강을 위하여”하고 외쳤다. 차를 마시니 배 속이 편안했다.
새단장을 한 찻집은 트리를 만들어 멋지게 장식해 놓았다. 그 앞에서 폼을 잡고 있는데 직원이 와서 기념 사진을 찍어 주었다. 요즘은 영업을 잘 하려면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잘 해야 한다. 12월도 번개모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각자 집으로 가는 방향이 달라 헤어졌다. 거리에는 술에 약간 취한 사람들과 근처 식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서로 악수를 나누며 발음이 얽혀져 외국 말처럼 들렸다. 채워진 술잔을 언제 마셔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