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국에서 건너와 백의종군로 직접 걸은 윤봉한 씨
미국 교포 윤봉한 씨, 백의종군로 24일 만에 완주
직접 걷는 동안 수없는 땀과 눈물 흘려
길가는 동안 도와준 동포들 고마워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인 윤봉한 씨(1948년생, 76세)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로를 따라 걷는 것이었다. 확신은 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라는 책을 보고서다.
출발은 한양 의금부가 있었던 자리라 여기는 현 서울 종각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했다. 백의종군로는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4월3일 선조의 명을 받고 백의종군을 시작하여 경남 합천군 도원수부에서 권율 장군을 만나 도착 보고를 하는 날까지의 여정을 말한다. 올해 5월10일이 마침 음력으로 4월3일이어서 그 분이 떠난 날짜에 맞춰 출발했고, 6월8일 토요일 비내리는 날씨에 마쳤다. 순례길 경비로 총 5~600만원 정도 들었을 것이다.
Q. 자신 소개를 부탁한다.
이름은 윤봉한. 1948년생 76세이다. 현재 미국 오레건(Oregon)주 그레샴(Gresham)시에 살고 있다. [태어난 곳은 전남 장흥군 장동면 봉동리. 전남 장평초, 장흥동중(現장흥장평중), 보성농업고(17회, 現다향고)를 졸업했다. 1978년 10월 미국으로 이민]
Q. 백의종군로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황현필 작가가 쓴 『이순신의 바다』란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순간 충무공의 백의종군길을 걷겠다 확신했다.
백의종군로 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청년 시절 이름인 김창수가 파옥탈주하여 삼남을 주유하신 길을 인천, 서울, 수원까지 걷고, 나머지는 휴가 기간이 짧아 차로 전주, 무주, 남원으로 이동했고, 함평의 육모정, 목포, 강진의 묘당도의 충렬사, 전남 보성의 쇠실, 화순 동북, 경남 하동의 칠불사까지 완벽한 순례를 했다. 그런데 미국 집으로 가서 생각해 보니 빠진 곳도 있고 해서 지난 해에 다시와서 김창수 선생의 남쪽 여정을 다 방문했다. 그리고 올해는 백의종군로를 완주하게 됐다.
Q. 며칠부터 시작했나? 준비는 어떻게?
작년 백범 김구 선생의 청년 시절 김창수의 길을 두 번째로 마치고 돌아가서 여러 가지 혼란스러웠다. 특히 이것으로 그만할 것인가 고민할 때, 침상 옆에 놓인 <이순신의바다>책을 집어들었는데, 백의종군로길이 있는 259쪽을 보고 “이것이다”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둘째딸에게 말을 했고, 딸의 도움을 받아 석 달 전부터 준비했다. 또 체력 부족이나 병이나 다쳐 치료할 기간까지 생각해서 2달을 기간으로 잡았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 걷기 훈련을 강행군으로 했다. 그러고 보니 2년 정도 준비 기간을 가진 것 같다.
5월6일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사흘간 준비 시간을 가졌다. 서울 길을 전혀 모르니 사전답사도 하고, 순례의 정확을 기하는 패스포트도 구했다. 대한체육진흥회의 걷기 연맹 사무소에 가서 인사도 하고, 그것을 얻어왔다. 더우기 그냥 걷는 것보다 내 정신을 올곧게 지켜줄 뚜렷한 표시로, <천웅 이순신(天雄 李舜臣) 백의종군(白衣從軍)길을 간다. 윤봉한 5월10일(4월 3일)> 내용의 깃발 준비에 신경을 쏟았다.
Q. 여정 중 힘들었던 것은?
신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얼빠진 개인들이 분명한 순례길에 드는 길목을 막아서 길이 없어지게 한 곳이 아주 여러 곳 있었다. 그런 부분을 아무도 마음 써서 관리를 하지 않아서 묵밭이 된 곳이 많았다. 뚜렷이 기억에 남는 곳은 전북 남원의 이백면에서 운봉으로 가는 ‘여원치’라는 재를 넘는 데, 모든 순례자들이 원래의 길을 가려고 도전해 가다가 저수지 위의 100여 미터부터는 리본도 없어지고, 길도 없어지면서 그때부터는 속수무책이다. 돌아내려가거나 계속 길을 만들며 찾으며, 온 것을 후회하면서 갔다. 기어코 포기하지 않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굴러 개천 풀바닥에 꼬라박힌 한 늙은이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또 경남 하동군에서는 순례길이 막힌 것에 화가 나서 하동군수를 택시를 타고 찾아간 일이 있다. 그 헛도는 거리와 허비한 시간을 생각해보라. 아무리 험해도 그분의 길자락을 찾아 역사적 일체감을 더듬다 실패하게 되면, 몸으로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 다 망친다.
뜻있는 몇 사람이 해마다 몇번씩만 오르내리며 옛 모습을 유지한다면, 순례한다는 엄숙한 마음으로만 갈 수 있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도 없고, 개인 욕심만 가득해서 위대한 영웅의 정신을 알지 못하는 무지, 담당 공무원들의 게을러터진 타성, 그들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감독관들까지 순수한 백의종군 순례길을 퇴색시키는 것같아서 그것이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Q. 어떤 마음으로 순례를 했는지?
김창수 님의 길을 순례할 때부터 순례중 지킬 사항으로 생각해 둔 것이 1)엄숙단정해서 품위를 지킨다. 2)둘레의 꼴에 따라 나를 맞춘다.(순응) 3)그 분이 나라면 이런 때 어떻게 하실가? 라고 생각하며 빗나감 없이 갔다.
백의종군로도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날 그날 몫의 천웅님의 일기를 읽으며 최대한 동일시하는 마음으로 가겠다고 준비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의식도 증발하기 쉬운 지, 나로서 가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늘 미안했다. 그런데, 머나먼 굽이길을 오르는 재마다에서 가장 많이 울었다. 그때 그분의 험상궂은 힘든 형편이 눈에 떠오르면, 가슴이 콱 맥키면서 눈물이 줄줄이 흐른다.
좋은 신발(운동화) 신고도 힘들어 하는 데, 그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는) 짚신 신고 어떻게 가셨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영웅의 마음, 고난을 참고 견뎠을 영웅의 마음을 느꼈다.
의왕시를 지날 무렵, 3차선 가운데 차를 세우고 내려 내게 묵을 주더라. 장미꽃 핀 아래서 그걸 먹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나라이기에 정이 없고 메마른 국민같았지만, 필요할 때 그렇게 사랑과 희생을 할 줄 아는, 그런 저력이 있는 나라란 것을 느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대해 이사벨라 버드 비숍(조선을 사랑한 여성 지리학자. 조선말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겼다)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 민중들은 체격이 좋고 잘 생겼고, 총명하다”고. 그에 비해 양반계급에 대해서는 ‘허가받은 흡혈귀’라고 비난을 했다. 그녀가 예측한 바대로 대한민국은 세계적 강대국으로 발돋음했다.
Q. 백범 김구(김창수) 선생 유적답사를 떠나고, 또 백의종군로까지 이어 걷게 되었는데, 많은 시간과 경비와 노력이 드는 일이다. 동기가 참으로 궁금하다.
‘늙어 죽기 전에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우리 겨레에 이순신 장군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고, 확신을 시켜주고 싶었다.
걷는 과정에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다. 단군의 자손이면 누구나가 한번은 걸어봤으면 좋겠다. 보람있는 일이다. 걸으며 어렵고 힘들고 할 때는 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는데, 10~15시간을 걸려 캄캄한 곳을 다닐 때, 이것(보따리)만 버리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충무공께서 조국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갖고 무거운 것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가신 조국에 대한 사랑을 떠올리며 걸었다.
내 이야기보다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마음이 더 빛났으면 한다. 그분께 바치는 선물같은 순수한 행위이다.
동기야 우리 단군의 자손에겐 다 있다. 하고 안 하고만 다를 뿐이다.
Q. 경비는 어떻게 충당했나?
합천군 삼가면에 도착해서 잘 자리를 찾았다. 그 곳에는 잘 곳이 없고 합천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진주서 오는 마지막 버스로 합천에 왔다. 밤 9시쯤일 것이다. 마침 합천에 축구경기가 있어, 선수들이 합천 모든 방을 다 차지해, 밤늦게 택시를 타고 고령에 가서 자고 온 일이 있다.
어떻게 보면 제가 백만장자냐 하는데, 아니다. 후원해주는 사람도 없다. 매일 모텔비 5만원. 한 번은 남원 이백면 효기리 마을 쉼터에서 자고. 전북 임실에선 천웅께서 살고 주무셨을 그 시대의 방과 가장 같은 천도교 임실교구의 방에서 자기도 했다. 잔뜩 급하고 갈 곳이 없을 때는 난생 처음으로 무인텔까지 자봤다. 먹고 마시는 것도 하루 최소한 삼 만원. 일주일에 거의 100만원이 가볍게 날라간다.
경비는 월남참전수당을 모았다가 완벽히 이번 백의종군 순례 행사에 썼다. 조국이 준 돈, 조국에서, 조국을 위해서 쓴다고 생각하니 기뻐 미칠 지경이었다.
Q. 과거 이력이 궁금하다. 언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나?
군대 제대를 한 그 해 말, 문교부 추천 파미실습생 선발에서 전남에서 3명을 뽑는 데, 보성농고를 나온 내가 광주농고와 다른 명망있는 농고를 나온 경쟁자들을 제치고 일등으로 뽑혀서 1973년 미국의 오레건 주의 젖소터에서 1년간의 실습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때 좋게 본 농장주가 고용비자를 얻어 주어 4년 뒤에 그 집으로 머슴살이를 갔다.
Q. 기억에 남는 일은?
“와 그라고 다니십니꺼?” 길을 모르는 내가 대구역으로 갔는데, 서울가는 기차는 동대구역으로 가야한다 해서 탄 전철안에서
어느 귀부인이 물으셨다. 1,700리의 대장정을 24일에 몰아부친 구리빛 얼굴, 빨간 셔츠, 괜찮은 바지에 하필이면 갓을 쓰고 있고,
무슨 깃발이 꽂힌 등망태에 대나무 지팡이를 든 괴이한 모습에 모두가 몰라라 하는 속에서 예리한 눈의 그 분이 놓칠 수 없었나 보다. 날마다 70리에서 120리 씩 걸어제친 대장정이 끝난 성취감과 허탈이 달그락거리는 전철에 녹아들고 있었다.
“혼자 다녔습니꺼? 아무도 없이 예?”, “사진 찍어도 됩니꺼?” 그 짧은 거리에서 귀한 것을 놓지지 않으려고 급히 몰아치셨다. “그 귀하고 아까운 것을 놓쳐서야 되겠습니꺼. 이리 꼭 연락 주시소. 꼭입니데이.” 명함 한 장이 내 손에 들려지고, 어디로 가서 어떤 것을 타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기고 그 분은 가셨다.
세 해를 봄마다 한 달씩 다녀도, 응접실의 개똥만큼도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첫 해는 여의도의 KBS 텔리비젼 방송국에 찾아갔다가 뒷문 문지기에게 거절당했다. 나를 드러내려고가 아니고, 나의 등에 업힌 애국지사들을 빛내려는 데, 모두가 그저 지나게 했다. “오매, 요런 시상에도 저런 분이 있네. 선생님이 티비에 나와야하는 디.” 서울을 세 해나 휘돌 때, 신문기자, 방송국 머슴들이 안 봤을 리 없다.
합천에 그 분이 계셨다. 아무도 몰라보는 귀중한 것을 찾아 다듬어 빛낼 줄 아시는 분이. 그것도 다 풀어헤친 눈꼴 사나운 것에서. 그것도 다 마치고, 어찌할 지 모르며 기진한 사람을. 나, 그 분에게 엎디어 큰 절을 올리고픈 백의종군 순례 끝에 가장 빛나는 횃불을 들어주신 합천신문사 편집위원 이석희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현재 백의종군로 기간 쓴 일기 겸 답사기를 정리중이며 조만간 이를 소개할 예정이다.
/인터뷰_박황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