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수필|나의 삶, 나의 인생 – 이호석 수필가
나는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전공도 없고 뚜렷한 목표도 없이 살았다. 되돌아보니 한마디로 좌충우돌하며 내 앞에 맞닿는 일에만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
나는 고향 합천의 어려운 농가에서 칠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님과 누님 한 분이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 셋에 여동생 하나가 있다. 나는 평소 칠 남매 중 가장 불운한 인생이라고 생각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 부모님이 중국 만주에서 만나 결혼하여 형님과 누님을 출생하였고, 그곳에서 20여 년을 살다가 해방되는 해에 이곳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주에서 알뜰히 모은 돈으로 합천읍 소재지에 제법 큼직한 기와집을 장만하였고, 아버지께서 소달구지를 끌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폭격으로 집과 전 재산을 태워버렸고 할아버지께서도 그때 돌아가셨다. 남은 식구들은 어쩔 수 없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기거할 집이 없어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3년 만에 초라한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
만주에서는 논 수십 마지기를 일구어 제법 여유 있게 살았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향에는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궁핍한 생활은 말할 수도 없었다. 일가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살아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해방 전후로 만주를 서너 차례 왕래하셨고 그곳에서 큰 살림을 이룬 경험이 있어 이런 환경에서도 배포가 크고 억척스러웠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시고 항상 가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돼 주셨다. 처음에는 황강 둔치에 전답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4, 5년 지나고부터는 인근 들논 한 마지기씩 사들였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식량 걱정은 면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내가 어떤 일 앞에서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아버지께서는 항상 “머슴아가 그렇게 용기가 없어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남자는 나쁜 일을 제외하고 무슨 일이든지 다 배워서 못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꾸중을 하셨다. 그때는 걸핏하면 하는 잔소리로 들릴 뿐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가면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평소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나는 그 말씀들을 되뇌며 용기를 내곤 하였다.
6, 70년대까지만 해도 맏손자, 맏아들만 최고로 여기며 아래 동생들과는 차별이 심했다. 형님이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식구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겨우 장만한 핫들 논 한 마지기를 팔아서 학비에 보태었다. 형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군에 입대하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께서는 아예 중학교에 보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농사일을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나 서운하고 앞이 캄캄하였지만, 불같은 아버지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하는 한숨만 내쉬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이 지나 합천읍 소재지에 대학을 졸업한 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불우한 후배들을 가르치는 한벗고등공민학교(야간중학 과정)를 설립하였다. 같은 마을 남녀 또래 네 명과 함께 다녔다. 낮에 힘든 농사일을 하고 밤에 공부릉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보리타작이나 모내기 등 일 철이 되면 늦게까지 일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땀내를 풍기며 가기도 했다. 그럴 때는 학교에 가서도 첫 시간부터 졸음과 싸우느라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학교는 인가가 나지 않은 2년째 학교였다. 수료 후 상급학교로 진학하려면 모두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했다. 나는 집에서 공부할 환경도 아니어서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고 20세가 되었으나 앞길이 캄캄하긴 마찬가지였다.
직업군인을 할 요량으로 육군 하사관학교에 자원입대 신청을 했다. 창원 예비사단에서 형식적인 시험을 치렀다. 67년 1월에 창원 39사단으로 입대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지정일에 찾아갔더니 경남에서만 60여 명이 모였다. 간단한 주의 사항을 듣고 저녁 늦게 야간 군용열차를 타고 목적지인 논산역으로 올라갔다. 역에서 내려 군용트럭을 타고 논산 훈련소로 들어갔다.
이른 새벽이었다. 연병장에는 하얀 눈이 군데군데 쌓여있고 곳곳이 얼어 붙어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과연 내가 여기서 훈련을 마칠 수 있을까 덜컹 겁이 났다.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그 시간부터 호랑이 같은 조교들이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들볶었다.
당시 논산 훈련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산에 육군 제2 하사관학교가 창설되었고 2년째 모집을 하고 있었다. 함께 입대한 사람 모두가 육군 보병 하사관으로 자원입대를 하였는데 수용연대에 있는 동안 지능검사를 한 후 주특기를 재분류하였다.
나는 행정 주특기인 부관으로 분류가 되었다. 군 생활은 조금 편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부족한 나의 학력으로 군 행정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4주간 기초 훈련을 받았고, 하사관학교에서 4주, 경북 영천에 있는 부관학교에서 16주간의 교육을 받았다.
부관학교 교육을 마치고 수료할 때 80여 명 중 다행히 4등으로 수료를 했다. 이것이 큰 행운이었다. 1, 2등은 자기가 희망하는 부대로 배치를 해 주었고 3, 4, 5 등은 교육을 받는 부관학교에 자충을 시켰다. 나는 하사 계급장을 달고 그곳 고시과에서 근무하였다.
부관학교에서 일 년 반쯤을 보냈을 때 서울 변두리에 육군종합행정학교가 창설되었다. 한때 10·26 사건으로 말썽 많던 정승화 장군(당시, 소장)이 초대 교장이었다. 이 학교 창설 목적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육군의 모든 특수 병과의 교육을 이곳에서 받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곳 학생연대 정작과에 보직을 받았다. 몇 달 후 중사로 진급하여 인근 마을에서 하숙 생활을 하였다. 퇴근 후 영화를 보거나 취미생활도 할 수 있었고 틈틈이 학원에 다니며 말단 공무원 시험공부도 두서없이 하였다.
나는 육군 부관학교와 종합행정학교에서 복무하는 동안 군 행정에 필요한 제반 교육을 몇 차례 받았고 공부를 하여 어떠한 실무에도 당황하지 않고 처리할 수가 있었다.
26세에 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군 생활처럼 규칙적이고 열심히 한다면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사회생활을 하기로 마음었던 것이다. 입대 전에 잠깐 일을 한 직종에 공무원 시험을 치르기 위해 3, 4개월 집에서 공부에 집중했다. 운이 좋았던지 바로 다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다.
나는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항상 학교 배움이 적은 것을 의식하면서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공직 근무 기간에도 남에게 별로 뒤지지 않았고, 남다른 애향심으로 고향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열심히 일한다는 자부심도 가졌다.
공직을 퇴직한 후에는 70여 명이 일하는 소기업의 관리자로 5년 근무를 하였고, 문화원, 군 노인회 등 사회단체 활동과 집안 종사 일에도 빠짐없이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남 앞에 나서지는 않았다. 나의 부족함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이 나에게 맡겨지면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새로운 배움이 있고, 작은 보람이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에서는 남자들의 군 생활을 허송세월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군 생활은 좌충우돌의 고민 속에 목표도 없이 한평생 방황할 내 인생에 공무원의 길을 터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군 생활 5년간을 항상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