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화재 내역과 풍수지리 (1) – 이병생 전 합천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

1.해인사 실화 내역
해인사는 신라 40대 애장왕3년(802)순응과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후 대규모 가람의 면모를 갖춘 해인사에는 그 영광에 못지 않게 실화(失火)의 재난이 유달리 많았다. 학조대사가 중창한지 200여년이 지난 숙종21년(1695년)에 실화하여 여러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가 불타고,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이 불타버리자 뢰음스님이 중건했다.
그로부터 그의 반세기도 지나지 못한 영조19년(1743년)에 또 실화하여 큰 축대 아래 수백간이 불타 버렸지만, 당시 경상 관찰사 김상성의 도움으로 능운스님이 중건했다. 또 20년 뒤인 영조39년(1763년)에 실화하였으나, 그때의 관찰사 김상철의 협조로 설파스님이 중건하였다. 또 정조4년(1780년)에 불이나자 5년 만에 성파 스님이 중건하였고, 그 후 32년이 지난 순조 17년(1817년)에 다시 큰 불이 나서 수천간이 모두 불타 버렸는데, 그때의 관찰사 김노경이 계획을 세우고 영월, 연월 두 스님이 중건하였지만 전날의 규모대로 완전히 복구하지는 못하였다. 또 50여년이 지난 고종8년(1871년)에 법성료가 다시 실화되었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들은 해인사 창건 이래 수많은 실화의 흔적과 중건•중수에 따르는 가람의 자취를 살펴왔다. 유달리 많은 실화의 사건 속에서도 사원의 중건은 계속되었다.
창건 이래 중건•중수의 결정적 역할은 국왕이나 왕족 또는 재상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음을 주목할 만하다. 또 우리나라 대장경 간행에 있어서도 자연히 호국적 염원이 강열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우리들은 대장경의 간기(장경간행에 대한 기록을 발문에 적는 것)나, 식기(사경에 대한 기록을 적는 것)에서 한결 같이 국왕의 수복과 국가사회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국가에 대한 기록은 없고, 부모의 왕생극락이나, 난고득락을 희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중국불교의 상이점에 대한 단적인 비교가 된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가 순수한 불교적 입장에서의 호국, 호민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중국고유의 유교적 효의 사상이 뿌리 깊이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우리의 사찰이 어느 것 하나 왕실과 인연을 맺지 않은 것이 없고, 국가와 민족의 정신 영역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호국과 호법의 정신은 해인사의 가람의 역사에 나타나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 가람의 정신이 이름 그대로 화엄경에 나타난〈해인삼매〉의 정신을 주축으로 하여 건립되었음을 생각 할 수 있다.
가람 배치는 나대 이후 일반형 사원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대적광전(대웅전)뒤편 높은 대상에 팔만대장경판전이 위치하고 있음이 주목 된다. 따라서 해인사 가람의 중심은 대장경판전에 있다 할 것이다. 수많은 화재의 법란 속에서도 장경판전은 그냥 보전되었던 사실이 장경조조에 따르는 고귀한 호국과 호법의 영험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상과 같이 176년 동안 7번이나 화재가 발생한 것은 비교적 많은 편이 아닐 수 없다. 고대로 해인사는 남산제일봉이 화산이기 때문에 대적광전과 정면 대립한 위치에 있으므로 화재가 많이 일어난다고 하여 1817년 제6차 화재이후 재건 할 때에는 적광전의 좌향을 서쪽으로 약간 우향하여 정초하였다고 한다.
본래는 적광전이 子坐午向이었는데, 풍수설에 의하면 子坐午向으로 세우면 수도인은 많으나, 화재가 빈번하게 되고, 丑坐未로 전향하면 도인의 배출은 적으나, 화재가 줄어진다고 하여 현재의 적광전 좌향은 丑坐未向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해인사에서는 빈번한 화재에 시달린 탓인지? 화재예방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그 전통인 즉 대적광전 앞, 장경판전 뒤, 극락전 앞, 학사대 밑, 천왕문 앞, 중봉석불 밑, 남산제일봉 아래에 각각 돌로 된 호박(臼)이 있다. 매년 음5월5일이면 그 호박에 소금을 한 되 정도 넣고 물을 담아 둔다. 특히 남산제일봉 밑에는 약 두되들이 단지에 소금과 물을 가득히 담아 뚜껑을 덮어 아무도 모르게 깊이 비매하여 둔다.
만약 이를 발견하게 되면 효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예부터 일반적으로 집을 지을 적에 들보에다가 축원적 입장에서는 應天上之三光하고 備人間之五福(응천상지삼강하고, 비인간지오복)이라 쓰고 龍佛紀(2534년)경오 월 일시 立柱上樑虎, 방호적 의미에서는 吾家有一客(오가유일객)하니, 正是海中人(정시해중인)이라. 口噴長江水(구분장강수)하여, 永滅火精柛(영멸화정신)이라고 쓴다. 龍1990년 月 日 時 立柱上樑龜.

2.해인사의 풍수지리설
예로부터 해인사를 위시한 형세가 파랑의 대해에 띄워진 방주와 같다 하였으니(행주형국형), 가야산이 선체라면 해인사는 선실이요, 중봉의 마애불상은 선장님이 서계심이며, 남산제일봉의 기암들은 삿대가 된다. 그리고 이 언덕에서 피안까지 무사히 중생을 요동 없이 옮겨주는 대척 중심부터 거대한 돛대가 있었으니, 장경각 뒤 노송속의 웅대한 바위가 바로 그 바위인 것이다.
그러나 63년전 병인년 큰 법당 축대공사 때 무참히 파괴되어 뿌리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으니 그 뒤로부터는 매년 사중이 무사 할 때가 없고 파도가 넘쳐 배에 물이 차듯 자꾸만 불교도 침체하는 재앙이 뒤따르는지라 이에 유지한 대덕스님들이 오랜 세월 말씀 끝에 돛대바위를 중건하였으니 이때가 병인년(불기2530년) 파괴된지 회갑되는 해 2월10일 날이며 연기문은 을축년 10월 그믐 포살날 율주이자 주지이신 동곡 일타스님께서 낙필하시다. 기단부에탑신을 세우고 보개를 이어 상륜부를 연결하니 팔정도와 칠각지로 불각을 증득하라는 연화상 8각7층탑이요.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하니 풍랑이 쉬어 바다에 만상이 비치듯 혜심의 발현을 기약 함이라 이름 하기를 수미정상탑이라 하니 수미는 최대요. 정상은 무상이러니, 최제일 유아를 자각케 함이라.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원컨대 반야선 타고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고통바다 일찍 건너
원아속득계족도(願我速得戒足道) 온갖계행 구비 하여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어서어서 원적산에 올라지이다.

▲ 풍수지리학설은 도선국사가 중국 당나라로부터 배워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목부를(나무오리)이용하여 터를 잡아다고 한다. -송광사. 통도사. 목부암 등
▲ 해인사는 행주형국형이다. 즉 배가 바다를 떠나가는 모형이라 한다. 이 행주형국형은 사람도 많이 모이고 돈도 많이 모인다고 한다. 그러나 지하수를 뚫으면 되지 않는다고 한다.
▲ 구광루(九光樓)의 글씨 九자에서부터 光으로 樓로 글씨가 점점 크게 쓰여 있다.
▲ 해인사 종루각 뒤편(서편)이 허하다고 하여 건물 을 지어서 그곳을 막았다.
▲ 해인사내 57채의 건물을 배의 모형으로 배치하여 바다에 배가 떠나가는 형국으로 형상화 시켰다.
▲ 해인사 내에는 지하수를 뚫은 곳은 어느 곳도 없다. 옛날에는 계곡수를 이용하여 홈대를 이용하다가 지금은 관을 묻어서 식수를 사용하고 있다.

3.호법의 얼이 얽힌 해인사 방화
①나옹화상의 신통묘력과 방화
가야산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3년인 802년에 순응, 이정 두 스님에 의해 개산되었는데 개산 후 12회의 대화재가 있으리라는 수호신장의 예언이 있었다고 전해오나 조선 숙종21년(1695년)이후 8회의 대화재는 기록에 의해 그 규모를 알 수 있지만 그 이전은 알 수가 없다. 특히 해인사는 고려고종 때(1236~1251)조각한 대장경판 8만 1천2백58쪽이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어 화재를 당할 때 마다 불, 보살의 가호와 제방 선지식 호법선신의 보호로 조금도 피해 없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니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며 불, 보살의 화현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550년 전인 고려충혜왕 2년인 1341년에 경북 문경군 사불산 대승사 산중에 묘적암이 있었고, 이 묘적암에 나옹라는 고승이 있었다.
나옹은 20세 때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어른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비통한 생각을 가지고 공덕산 묘적암에 가서 요연화상에게 득도하고 수행에 전념하여 견성오도한 후 화심을 하며 만행하던 24살 되던 해에 묘적암에 잠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