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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은 흐른다(4) 가을 악견산 – 박태일

악견산이 슬금슬금 내려온다
웃옷을 어깨 얹고 단추 고름 반쯤 풀고
사람 드문 벼랑길로 걸어 내린다
악견산 붉은 이마 설핏 가린 해
악견산 등줄기로 돋는 땀 냄새
밤나무 밤 많은 가지를 툭 치면서 툭
어이 여기 밤나무 밤송이도 있군 중얼거린다
악견산은 어디 죄 저지른 아이처럼 소리 없이
논둑 따라 나락더미 사이로
흘러 안들 가는 냇물 힐금힐금 돌아보며
악견산 노란 몸집이 기우뚱 한 번
두 번 돌밭을 건너뛴다 음구월
시월도 나흘 더 넘겨서
악견산이 슬금슬금 마을로 들어서면
네모 굽다리밥상에는 속 좋은 무우가 채로 오르고
건조실에 채곡 채인 담배잎
외양간 습한 볏짚 물고 들쥐들 발발기는
남밭 나무새 고랑으로 감잎도 덮이고
덜미 잡힌 송아지같이 나는 눈만 껌벅거리며
자주 삽짝 나서 들 너머 자갈밭 지나
검게 마른 토끼똥 망개 붉은 열매를 찾아내고
약이 될까 밥이 될까 생각하면서
악견산 빈 산 그림자를 밟아가다 후두둑
산이 날개 터는 소리에
놀라 논을 질러 뛴다.

손국복 시인의 시평 |

악견산은 인근에 있는 금성산, 허굴산과 함께 삼산(三山)으로 불리며 산세가 험하고 이름처럼 거칠지만 합천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 좋은 명산이다.
늦가을, 시인은 악견산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면서 밤나무 가지도 흔들고 나락더미 사이 논두렁 밭두렁을 건너뛰면서 슬금슬금 마을로 들어선다. 정겨운 마을에는 인정과 풍요가 흐르고 악견산은 붉은 저녁노을로 이마를 적신다.
합천의 정취를 가을 악견산으로 노래한 박태일 시인은 율곡면 문림리에서 태어나 부친을 따라 부산으로 이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후 <옥비의 달> 등 주옥같은 시집을 펴낸 한국 문단의 주목받는 작가로 또 경남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친 황강이 낳은 큰 시인이자 지역문학연구가로 지금도 왕성한 필력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