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화재 내역과 풍수지리 (2) – 이병생 전 합천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
여름철이 되어 주지스님의 아침공양을 준비하기 위하여 우물가에서 상치를 깨끗이 씻고 있던 중 문득 멀리 동남 천을 바라보니 시커먼 화기가 충천한데 그 위치는 가야산 해인사 부근이었다.
나옹화상은 해인사 대적광전에 불이 난 것을 즉각 알고 씻고 있던 상치를 손에 들어 하나 둘씩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물을 손으로 떠서 동남 천을 향해 훌훌 부려 보냈다.
그랬더니 동남 천에 화기가 점점 없어지고 하늘로 치솟던 검은 연기도 사라져 없어지기에 나옹은 안심하고 줄어든 상치를 주지스님 아침 공양 상에 깨끗이 씻어 올렸다.
주지스님은 대노하여 “너 이놈 아침 햇살이 들기 전에 공양을 올리라고 했는데, 오늘 아침은 무슨 일로 이렇게 늦으며 그 흔한 상치는 왜 이렇게 작게 놓았는냐?”고 하며 나옹을 대중 앞에서 크게 꾸짖었다. 나옹은 같이 있는 동료와 여러 사람에게 보란 듯이 꾸짖는 주지스님의 꾸지람이 한편으로는 불만스럽기도 하였으나, 주지스님을 직접 시봉하겠다고 하심 한 터라 “스님! 정말 죄송하옵니다. 그러나 너무 욕하지 마옵소서! 제가 아침에 우물가에서 상치를 씻고 있노라니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에 불이 붙길래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상치와 물을 가지고 그 불을 끄다보니 좀 늦었습니다.”하고 사실대로 이야길 했다. 그러나 이 말을 황당하다고 생각한 주지스님은 “네 이놈! 방자를 떨지마라. 네까짓 녀석이 해인사 대적광전에 불이 난 줄을 어떻게 알며, 설사 알았다 해도 수 백리 밖에 앉아서 씻던 상치와 물을 가지고 어떻게 불을 껏단 말이냐?”고 하며 더욱 화를 내고 안절부절 못하였다.
여러 대중 앞에서 심한 꾸지람을 듣고 대중들마저 픽픽 조롱하는 등 수모를 당한 나옹은 아무 말도 없이 빙긋이 웃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아침 공양이 끝난 뒤에 공양 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상을 들고 나가던 나옹은 장작에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다가 부뚜막에 놓여있는 천수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이것을 본 주지스님은 뒤따라 나오면서 뒷머리를 때릴 듯한 기세로 “이놈! 스님한테 꾸중을 듣고 무슨 발악이냐?”하며 대노 하였다.
그러나 나옹은 부드럽고 천연덕스런 미소를 지으며 “스님! 염려마세요. 엎질러진 천수 물을 제가 다시 주어 담을 테니·····!”하면서 흙이 묻은 물을 살짝살짝 두 손으로 모으니까 겨울에 어린이들이 눈사람 만들려고 눈을 굴리듯 천수 물이 티 하나 없이 둥실둥실 뭉쳐지더니 나중에는 축구공처럼 커졌다. 다시 나옹은 그 물 덩어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발로 힘껏 차니 공처럼 굴러가다 큰 바위에 부딪치자 물 덩어리가 깨어지며 물이 스쳐간 바위에는 밭고랑처럼 큰 흔적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것을 본 주지스님과 동료 대중은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산중에 퍼져 나옹은 보통 스님이 아니고 가장 신통이 뛰어난 도승이라고 칭찬하며, 나옹을 극찬하게 대접까지 하였는데, 이날 저녁부터 나옹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며칠 후 가야산 해인사에서는 대화재가 있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더구나 묘적암 나옹의 일도 있고 해서 대승사와 금룡사 두 주지가 약속을 하여 함께 해인사 화재위문을 갔더니 화재가 난 당일에 서북쪽 공중에서 상치 잎과 물방울이 큰 폭포처럼 대적광전 위로 날아와 치열하게 치솟던 불길이 잡히고 위기일발의 큰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는 해인사 주지스님의 설명이 있었다고 한다.
전기에 의하면 이후 나옹화상은 중국 원나라 북경에서 지공화상을 친견계오 하였으며, 1371년에는 공민왕사가 되어 대조계선교도총섭 근수 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의 호를 받기도 하였는데, 대적광전 화재를 미연에 막아 팔만대장경판을 보호한 호법 방화로 유명하다.
-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➁추사김정희의 원력과 방화
해인사에 들어서면 편액이나 주련에는 추사의 필을 찾아 볼 수 없다. 해인사 고서에 의하면 순조17년인 정축년(1817년)에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장경판전을 제외하고는 대적광전을 비롯한 각 법당, 제요사 등 거의 모든 전각이 불타는 대화재를 당했다.
그 우람한 전각과 요사가 이조에 잿더미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모든 대중이 원력을 세워 불, 보살님께 불사의 원만성취를 기도하며, 복구에 나서고 있을 때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김노경 거사가 그 아들 추사에게 상량문을 짓게하고 해인사 주지스님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해인사에서는 영월, 연월 두 스님에게 재목을 구하게 하고, 화주승을 정하여 관찰사의 협조하에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는 한편 각 고을과 절에서 공사재를 거두어 불사를 순조롭게 진행하여, 이듬해인 무인년(1818년)에 해인사 재건의 대불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대화재에 큰 고통을 당한 해인사에서는 화재를 예방하고 불, 보살의 가호가 충만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법화경중의 화성유품과 육방불명으로 육위아랑을 대신하여 상량문에 넣기로 하고 그 글씨를 추사 김정희에게 부탁하였다.
상량문의 청을 해인사 주지스님으로부터 연락 받은 추사는 7일을 목욕제계하고 불, 보살님께 원력을 세운 후 상량문을 환성하여 대작불사를 회향하게 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기록에 전해오는 전7회와 같은 대화재는 물론 조그만 화재도 없었다고 하니 이는 부처님의 가호와 추사의 원필이 화재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세인은 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