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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시절의 인정이 그립다 – 이호석 수필가

보릿고개 하면 6, 70대 이상이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어려운 시절 이야기다. 물론 그 이전에도 더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보릿고개란 말이 통용된 것은 1940년대에서 60년대까지가 아닐까 싶다. 보릿고개란 지난가을에 수확한 벼(식량)가 거의 바닥나고 여름 식량인 보리가 익을 무렵인 늦은 봄철을 말한다.
그때가 되면 식량 부족한 집이 많아 나물을 뜯어다가 쌀을 조금씩 넣고 죽을 끓여 먹거나 고구마 등으로 연명하기도 하고 채 덜 익는 보리를 베다가 훑어 말린 후 방아를 찧어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였다.
당시에는 대부분 가정에 3대가 함께 살고 자녀들이 많아 보통 열 식구가 넘었다. 우리 집에도 할머니, 고모, 부모님, 그리고 칠 남매 형제들로 열두 식구가 살았다. 우리 집은 전답이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식량 걱정을 해야 했다. 가을 추수를 하고 제법 많은 벼를 짚으로 만든 뒤주에 쌓아두지만, 늦은 봄이 되면 식량이 거의 바닥난다.
주곡인 쌀과 보리쌀이 양식으로 가장 많이 들어가지만, 가정 생활용품과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의 월 회비, 학용품 구입비 등 가계에 필요한 돈을 모두 곡식을 팔아 장만 하였기 때문에 영세농가에서는 항상 식량이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그때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요즈음과 같은 간식거리가 없어 하루 세 끼 고봉밥으로 배를 채우니 양식도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서는 마을에 있는 작은 정미소에서 벼를 찧어 쌀가마니 채로 마루에 가져다 놓고 먹었는데도 얼마 가지 않아 바닥이 났다. 어린 우리는 별로 보지만 부모님은 가마니의 쌀이 끼니때마다 푹푹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수시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가마니의 쌀이 생각보다 빨리 줄어든 이유가 또 있었다. 돈 한 푼 나올 때 없는 집에서 누님이나 고모님의 화장품, 옷가지 등 필요한 물건을 살 때는 할머니의 묵인 아래 쌀을 조금씩 퍼내어 이웃에 팔기도 하였고, 때로는 할머니가 한마을에 살고 계시는 삼촌 댁에 아무도 몰래 조금씩 가져다드리기도 했다. 이런 중에도 우리 형제들은 간혹 간식거리로 쌀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아버지 몰래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남편 중간에서 이런 일을 다 알고 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썩이곤 하였다.
그렇게도 어려웠던 그 시절이 지금에 와서 왜 그리울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래도 그때는 이웃 간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 적어나마 인심과 인정이 흘러 사람 사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내 어느 가정에 길흉사가 있으면 온 마을 어른들이 모두 나서 내 집일같이 함께하였다. 또 어느 집에서 제사가 드는 날이면 계절이나 날씨와 관계없이 제사를 지내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나이 많은 어른이 계시는 집에는 등불을 들고 제삿밥을 직접 가져다드렸고, 이튿날 아침에는 집집의 대주를 불러 모아 제삿밥을 나눠 먹었다. 그 시간은 온갖 마을의 이야기가 오가며 소통하고 친목을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 제사가 있을 때는 이른 아침,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가 집집을 뛰어다니며 어른들께 제삿밥 잡수러 오시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어린 마음에 남의 집에 무엇을 얻으러 가거나 빌리려 가는 심부름은 하기 싫었지만, 맛있는 밥과 떡, 술을 준비해 놓고 마을 사람을 초청하는 심부름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알렸다.
마을 어느 집에 결혼일이 정해지면 결혼 며칠 전부터 마을 집집에서는 부조 거리로 막걸리 한 동이나 묵 한 판씩을 준비하여 잔칫날 가져왔다. 그날은 본가에서 준비한 음식과 부조로 들어온 음식으로 손님을 접대하였다. 잔칫날이 되면 언제 어디서 듣고 오는지 거지 손님(?)들이 먼저 덜어 닥친다. 7, 8명씩 떼거리로 몰려와 배불리 얻어먹고 가지만, 주는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또 그날 저녁에는 마을 청장년들이 어느 집 사랑방에 모여 앉아 그중 나이 적은 사람 서넛이 잔칫집으로 가 단자(음식)를 얻어와 함께 먹곤 하였다. 또 설 명절에는 자기 집안 차례를 지내고 나면 초등학생부터 청년들까지 또래끼리 모여 집집을 다니며 어른들께 세배하고 설 음식을 맛있게 얻어 먹곤 하였다.
당시 각 가정에서는 주요 생활용품이나 농사용 연장 등은 부모님이 5일 시장에 나가 사 오지만 아이들이 먹는 과자나 사카린, 소다, 빨랫비누, 막걸리, 사이다 등 잡다한 일용품은 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 주막집 구멍가게에서 샀다. 구멍가게는 초가집 좁은 방 옆 손바닥만 한 마루가 전부였다. 물건을 넣는 진열장도 제대로 없고 허름한 종이상자 위에 널어놓고 팔았다.
마을 앞 도로는 국도(國道)였지만 흙과 자갈이 섞인 비포장도로였다. 키 큰 버드나무 가로수가 도로 양측에 늘어서 있어 운치는 좋았지만,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면 심한 흙먼지가 주변을 덮었다. 이때는 도로 가장자리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멈추었다가 가기도 하였다. 구멍가게의 상품도 모두 먼지 범벅이 되어 주인은 수시로 먼지를 털어야 했고, 도로 주변의 가로수와 농작물은 항상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 농부들이 논밭에 들어가기도 꺼렸다.
그때는 돈이 귀해 구멍가게 거래는 대부분 외상 거래였다. 가겟집 기둥에는 삐뚤삐뚤 서툴게 쓴 마을 어른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외상 장부가 걸려 있었고 마당에는 제법 넓은 대나무 살평상이 있었다. 마을 어른 들은 농사일 틈틈이 그 위에서 모여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분주히 떠들기도 하였고 가끔은 화투 놀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주막집에 물건을 사기 위해 심부름을 자주 갔다. 현금을 가지고 갈 때는 신나게 가지만 외상 심부름을 갈 때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그 집 사립문 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인데도 매일 같이 마을에 식량 동냥을 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식사 때가 되면 밥을 얻어먹기 위해 거지들이 오기도 했다. 대다수 농가에서 식량이 부족하고 살림살이가 어려웠지만 그들을 거저 돌려보내지는 않았다. 쌀과 보리쌀을 한 줌씩이라도 주었고 밥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어떨 때는 보따리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와서 밥을 얻어먹고 갈 때도 있고, 가끔 늦은 저녁이면 할머니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아침까지 먹고 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인심이 좋았고 인정도 있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그런 인심과 인정이 베풀어졌던 것은 모두가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역지사지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들의 처지를 더 딱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농민들의 순수한 마음은 바로 천심이었다.
지금은 그때 비하면 모두가 너무나 잘살고 있다. 그러나 상부상조 정신과 측은지심은 없어지고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오히려 인심도 각박하고 인정도 메말라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그 어려웠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있었던 훈훈한 인정과 순수한 사람들의 향기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