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강은 흐른다 (15) 그런 신(神)이 내게는 있네 – 이초우
나에겐 그런 신이 있네
잊을 만하면 줄거리를 읽어주곤 하는
그런 신이 내게는 있네
열일곱에 황매산 떠나
알 수 없는 바다 떠돌기를 수십여 년
내가 땀 뻘뻘 흘리며 노동을 할 때나
우당탕, 하늘 쪼개는 낙뢰가 떨어질 때는
고맙게도 나의 신은
그 많은 장면 숨겨 놓았다가
내가 번민의 고통에서 힘겹게 빠져나와
한숨 돌리고 널브러져 있을 때나
구름 가는 하늘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태풍에 살아남은 초록 나뭇잎이
목어(木魚)처럼 힘차게 헤엄치는 사이로
몇 개의 줄거리 영상으로 보여주며
내 쓰린 영혼 쓰다듬어 주던 그런 신(神),
그럴 때마다 나는
혼인색을 띠며 귀향하는 연어의 몸처럼
얄랑얄랑 꼬리짓하며
청정 내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네
어찌 보면 열일곱 해 그리 길진 않은데
한 생의 전부 같은 깊은 골 고운 시간
끊임없이 내 이야기들 주관하는 그런 신,
고향 신(神)이 내게는 있네.
| 손국복 시인의 시평
신(神)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종교론자들의 전언이 많기도 하지만 고향신(故鄕神)의 스토리를 시(詩)에 담은 작가는 참 드물다. 열일곱 유년의 나이에 황매산이 바라다 보이는 합천 가회 고향을 떠난 시인의 가슴 속에는 늘 고향신이 살아 있었다. 수십 년을 외국에서 건설업에 매달려 산업 역군으로 기업가로 경제 활동을 하면서도 시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았던 이초우 시인은 <현대시>로 등단 후 줄곧 초현실적 경향의 실험시를 쓰면서 시집<1818년 9월의 헤겔선생>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고향을 떠난 후 쭉 부산에 거주하며 생활인으로 문학 활동을 병행하다 2023년 12월, 지병으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