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때 공을 세웠다고 하여 합천 창의사에 봉안한 122명 중, 가짜 의병 69명은 들어내야 한다 (1) – 조찬용 남명선생 선양회장
2001년부터 합천 창의사(彰義祠)에 봉안하여 매년 5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는 임란(壬亂, 1592년~1598년) 때 의병투쟁을 한 사람들의 명단을 합천군에 청구하여 받았다. 무명 의병(2명) 포함하면 무려 122명이다.
이 중 가짜 의병 투쟁을 한 사람을 선별하여 정리해야 한다. 5월 10일 창의사 ‘임란의병 추모제향 봉행’ 때는 가짜 창의자(倡義者, 의병) 69명은 들어내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진짜 헌신하고 희생하신 의병대장(義兵大將, 정인홍) 및 의병(義兵)을 선양하는 기념일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01년 국비 등 61억원으로 준공·개관한 합천 창의사(彰義祠)에는 의병대장·영의정 서령부원군 내암 정인홍(瑞寧府院君 來庵 鄭仁弘, 1536~1623.4) 등 122명(2001년에는 110명) 의병(義兵)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이를 선양하고 있다.
1978년 건립한 의령읍 충익사(忠翼祠)에는 경상병사(慶尙兵使, 종2품) 충익 망우당 곽재우(忠翼 忘憂堂 郭再祐,1552~1617) 등 18명을 봉안하고 있다.
1728년(영조) 3월 이른바 무신변란(戊申變亂, 정희량-조성좌의 난) 후 1734년(영조10) 늦봄에 곽재우 현손 곽원갑(郭元甲, 1684~1739)이 기록한 것을, 임란 후 173년 지나 1771년(영조47)에 보집(補輯)하여 간행한 ‘창의록(倡義錄)/1권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곽재우 권란 윤탁 박사제 등 의병 289명이 실려 있고, ‘창의록(倡義錄)/2권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에는 곽재우 윤탁 조목(趙穆) 유운룡(柳雲龍) 유성룡(柳成龍, 형: 유운룡) 유진(柳袗, 부: 유성룡) 이원익(李元翼) 등 559명, 총 848명이 등재돼 있지만, 충익사에는 18명만 봉안하고 있다.
이는 창의록(倡義錄)이 과장(誇張), 왜곡, 날조까지 돼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왕산성에서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다.
곽원갑은 고조인 곽재우의 신념과 당색을 고수하는 등 지조를 지켜 1736년(영조12) 3월 이인지(李麟至) 등(4700여명)의 ‘송시열-송준길 문묘 배향 반대 상소’에도 참여한다.
합천 창의사 122명과 의령 충익사 18명!
합천 창의사 122명을 기준으로 하면, 의령 충익사는 848명을 봉안해야 한다.
의령군은 건물(사당) 이름도 곽재우 시호(諡號) ‘충익(忠翼)’을 빌려 충익사(忠翼祠)로 지었다. 그러나 합천은 당호(堂號, 집이름)를 전국에 늘려 있는 창의사(彰義祠)로 2001년에 지었다. 합천은 고민없이 명명(命名)한 것이다.
18명을 봉안한 충익사(忠翼祠)에는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를 주군(主君)으로 하여, 윤탁(尹鐸) 박사제(朴思齊) 정연(鄭演) 정질(鄭晊) 노순(盧錞) 허자대(許子大) 등 삼가 의병(三嘉 義兵) 6명과 곽재우(郭再祐) 권란(權鸞) 심대승(沈大承) 안기종(安起宗) 오운(吳澐) 이운장(李雲長) 배맹신(裵孟伸) 허언심(許彦深) 강언룡(姜彦龍) 심기일(沈紀一) 조사남(曺士南) 주몽룡(朱夢龍) 등 의령 의병 12명 등 18명만 봉안하고 있다.
이중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功)을 세웠다고 하여 1605년(선조38)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3등 총 9023명)에 책훈된 사람은 전 병사(前 兵使) 곽재우(郭再祐, 1등), 정(正) 권란(權鸞, 2등), 정(正) 심대승(沈大承, 2등), 봉사(奉事) 안기종(安起宗, 3등), 정(正) 윤탁(尹鐸, 3등) 5명이다.
122명을 봉안한 합천 창의사에 의병대장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우의정·좌의정·영의정 역임) 휘하에서 의병투쟁을 한 인물 중 선무원종공신록권을 받은 사람은 정인홍(鄭仁弘) 손인갑(孫仁甲) 정인함(鄭仁涵) 정결(鄭潔) 문려(文勵) 1등, 박이장(朴而章) 정언충(鄭彦忠) 성정국(成定國, 미봉안) 2등, 윤탁(尹鐸) 전제(全霽) 이승(李承, 미봉안) 정상례(鄭尙禮, 미봉안) 하종해(河宗海, 미봉안) 3등(等) 등 13명(이중 4명 미봉안)이다.
■ 임란 때 선비·사대부(유생, 문관)들이 전투에 직접 참전한 것, 지극히 드물었다. 의병대장 내암 정인홍이 57세 때 직접 성주성 전투에 참전한 것 등이 있지만…
아래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 예전(禮典)’을 보면, 임란 때 ‘(사대부가 아닌) 가동(家僮), 즉 집안의 노비로 군대(주: 의병단)를 편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시다시피 평상시에도 양반(선비-사대부)은 양인(평민) 및 노비와 달리 군역(軍役, 군복무-속오군)의 의무조차도 없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1797년 승지 역임)은 1731년(영조7)부터 시행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즉 ‘아버지가 노비고 어머니가 양인(良人: 상민·평민)일 때 그 자녀는 어머니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것’을 거세게 비판했다. 노비수가 감소돼 변란이 발생하면, 이를 평정(진압)할 군대를 편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옹정(雍正) 신해년(1731년) 이후에 출생한 모든 사노(私奴)의 양처(良妻) 소생(所生)은 모두 어미를 따라 양민(良民)이 되게 하니(주: 노비종모법), 이때부터 위는 약해지고 아래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민심이 흩어져 통솔할 수 없게 되었다. 그중 분명한 사실을 가지고 말해 보겠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년) 난리(임진왜란) 때에는 남방(南方, 경상도·전라도)에서 창의(倡義)한 사람들이 모두 집안의 가동(家僮, 노비) 수백 명으로 군대를 편성했는데, 가경(嘉慶) 임신년(1812년) 난리 때, 즉 서적(西賊, 홍경래난) 때에는 고가(故家) 명족(名族)들이 창의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한 명의 노비도 구하기 어려웠다[萬曆 壬辰之難 南方倡義之家 皆以家僮數百 編爲卒伍 嘉慶壬申之難 西賊也 故家名族 相與議事 而一家一僮 亦且難得].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대세가 완전히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국가에서 믿을 곳은 사족(士族)뿐인데, 그들의 실세(失勢)가 이와 같으니, 만약 위급한 일이 생겨 백성들이 모여 난(亂)을 일으킨다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小民將相聚以爲亂 而誰能禁之]. 이를 본다면 (노비 수를 줄인) 노비법(주: 종모법)은 잘 변한 것이 아니다[奴婢之法 未善變也].”고 했다. (정약용/목민심서·牧民心書/예전·禮典 6조/제5조 변등·辨等)
*블로그 ‘합천 창의사 봉안 임란 의병 122명 중 가짜는 들어내야 한다(민원서).’ 참조: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3790872091
■ 아래 122명 중, 창의사에서 가짜 의병 69명을 봉안하고 있다. 최소 아래 × 69명은 들어내야 한다.
이들 대신, 판관(判官, 종5품) 성정국(成定國, 안언 전투 참전, 창녕 출생, 창의사 미봉안), 부장(部將, 종6품) 정상례(鄭尙禮, 1558생, 고령 출생, 1589년 문과 급제, 미봉안), 참봉 하종해(河宗海, 1557~?, 5촌당숙: 하혼-하개, 처남: 화음 권양, 미봉안), 정(正) 이승(李承, 성주기군장·星州起軍將, 미봉안), 이언성(李彦誠, 안언 전투 참전, 전 울산군수, 미봉안), 주국신(周國新, 처조부: 갈천 임훈, 순절, 미봉안), 정사서(鄭士恕, 별초정병(別抄精兵), 미봉안), 손약해허(孫若海虛, 부: 손인갑, 순절, 미봉안), 한여택(韓汝澤, 무계 전투, 합천 사촌리 출생?, 미봉안), 박성(朴惺, 현풍 출생, 미봉안), 곽추(郭趨, 곽재우 아재뻘, 미봉안), 김응성(金應聖, 1556~1614, 고령 출생, 미봉안), 배설(裵楔, 합천군수, 성주 출생, 미봉안), 이홍우(李弘宇, 1536~1594, 고령 출생, 소모관, 정인홍 휘하 성주성 전투 참전, 미봉안), 박응성(朴應星, 성주 안언 전투, 순절, 미봉안), 장호(張浩, 성주 안언 전투, 순절, 미봉안) 등 미봉안자 16명은 추가로 창의사에 봉안해야 한다. 즉 창의사에 봉안하고 있는 가짜 의병 69명을 들어내고, 의병대장 정인홍 등 53명과 미봉안 16명을 보태 69명을 봉안해야 한다.
다만, 의령 충익사 곽재우 등 18명만 봉안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정인홍 손인갑 윤탁 등 50명(정인홍 등 창의사 봉안자 34명+미봉안자 위 16명)만 창의사에 봉안하는 게 맞다.

위 ×는 의병투쟁을 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는 자다. 위 2번 손인갑(孫仁甲, 1542~1592.6.29)은 가덕도 첨사(僉使, 종3품) 등을 역임했는데, 본적은 밀양이고, 1570년(선조3) 29세 때 무과(武科) 시험 응시 당시에는 창녕에 살고 있었고, 임란 때는 의령 봉수에 거주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