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위에 피어난 희망 – 이재욱 전 합천경찰서장
비가 그친 마을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젖은 가구와 흙탕물 자국이 벽마다 남아 있었고, 문 앞에 쌓인 삶의 조각들은 말없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친구와 아들, 그리고 나.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 섰다. 말이 필요 없는 풍경 앞에서,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소란은 없었다. 진흙을 걷어내는 손, 부서진 물건을 정리하는 몸짓, 서로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도 앞서지 않았고, 누구도 뒤에 있지 않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한 만큼의 마음이 모였다. 그 작은 마음들이 쌓여 무너진 일상을 천천히 다시 세워가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말없이 물 한 잔을 건넸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이 마을이 굳건히 일어설 것임을 확신했다. 사람의 따뜻함은 침수되지 않았고, 손끝에는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희망은 크고 요란한 것이 아니었다. 젖은 벽지를 걷어내는 손길, 무거운 짐을 나르는 어깨,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조용한 연대. 그것이면 충분했다.
무너진 것은 집이었지만, 다시 일어서는 것은 사람이다. 함께였기에 가능했고, 함께였기에 의미 있었다.
그날 진흙 속에서 내가 본 것은 단지 복구의 현장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 있다.
_이 글은 최근 집중호우로 수해를 당한 합천 곳곳을 일주일간 복구 봉사를 하고 느낀 소회를 담은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