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암산 아리랑 (1) –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
순희의 소식을 들은 것은 우리가 헤어진 지 50년이 흐른 가을날이었다.
고향에 사는 중학교 여자 동기로부터 순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나에게 남긴 편지가 있다는 전화가 왔다. 전화 받은 다음 주 고향에 내려가 그 편지를 받았다. 동기 친구는 순희가 출가한 후 말년에 대암산 아래 청솔암聽蟀庵에 거처하였고 법명은 자행慈行이었으며 유골은 유언에 따라 청솔암 앞산 대암재 마루 돌배나무 아래에 뿌렸다는 말도 전해 주었다.
한지로 고이 접은 봉투에 한자를 섞어 붓으로 내리쓴 편지는 수도자의 고결한 향기가 배어 있는 한편의 시였다.
사랑이여
사랑의 季節계절이
강물처럼 흘러간 後후
哀戀애련은 僧服승복을 입고
밤이면 風磬풍경소리에 운다
아……!
가슴이 터지던 離別이별이여
잃어버린 사람이여
가련한 憧憬동경은
山寺산사 여울에 부서진다
달빛 서린 박꽃으로 만나
大岩山대암산에서 南汀江남정강에서 情정들을 엮었는데
수없는 밤
새벽 鐘종 소리에 우는
귀뚜라미 피 울음아
많은 時節시절에
多情다정했던 모습들이
밤마다 木鐸목탁 소리에
목이 멘 歲月세월아
아……!
사랑해서 슬펐던 이름이여
사랑해서 헤어진 사람이여
밤이면 痛哭통곡하던 사랑의 傳說전설이여
山寺산사의 밤은 끝없이 깊어 간다
사랑이여
우리 그렇게
떠나야만 했던가
이 밤 새벽 鐘종은 누가 울리는가
날자는 없지만 오래 바래어 부스러질 것 같은 봉투는 수십 년의 세월을 말해주었다. 귀뚜라미 촉수같이 두 줄기 길게 뻗은 수결은 순희가 오래전 편지를 보낼 때 쓰던 것이었다.
편지는 긴 세월 마음 저 밑에 잠겨 있던 아픔을 불러왔다. 그 옛날의 대암산과 남정강의 일들이 파노라마로 이어졌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다음 날 청솔암을 찾았다. 청솔암이 자리한 대암산은 합천의 중앙에 있는데 그 서북쪽 줄기에 순희가 살던 마을 새미실이 있고 함께 뻗은 서쪽 줄기 끝자락에 내가 살던 마을 하니가 있다.
나는 대암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걸었다. 골짜기 저수지에 도착해 한숨을 돌리고 왼쪽으로 이어진 대암재에 들어섰다. 이 고개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지게 짐 지고 다니던 길이었는데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억새가 무릎까지 올라왔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그녀의 유골이 뿌려졌다는 오백 년 묵은 몇 아름드리 돌배나무가 유구히 서 있었다. 나무 아래에 재를 넘던 사람들이 안녕을 위해 던진 돌들로 만들어진 돌무덤과 가쁜 숨을 돌리던 널찍한 평상바위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와 마지막 밤을 보낸 평상바위에 앉았다. 작은 돌배가 가득 달려 있었다. 소나무 사이 저 아래에 청솔암이 있는 대암 마을이 보였다.
내가 순희를 처음 만난 것은 열 살이 되기 전 어느 봄날 고사리 꺾으러 올라간 대암산에서였다. 봄이 오면 대암산 주위 아낙들은 고사리를 꺾고 홀잎을 따러 대암산을 오른다. 나도 막내 고모를 따라 산에 올라갔을 때 산 너머 새미실 마을 아낙들과 함께 온 순희를 만난 것이었다. 그날 나는 순희가 진달래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름도 몰랐다.
내가 다시 순희를 만난 것은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우리가 다닌 중학교는 덕유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천에 와서 백사장을 S자로 굽이돌아 흐르는 남정강 가에 있었다. 우리 학년은 두 반 120명이었는데 그중 여학생은 20명이었다. 교실이 전쟁 통에 불타 소실된 후 흙벽돌로 지어 창문은 좁았고 바닥은 흙이었다. 해방둥이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태어나고 6·25전쟁의 폐허에서 자라나 대부분 월회비를 내기도 힘들었는데 내가 나온 국민학교에서는 72명 중 남자 8명이 시험을 거쳐 중학교에 진학했다. 국민학교 때는 한복 바지나 치마에 저고리에 고무신을 신었는데 중학교에 가서 처음 ‘中’자 모표가 달린 모자를 쓰고 검정색 교복 윗도리와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책상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나는 순희와 함께 남녀 혼성 A반이었는데 남학생이 40명이고 여학생은 20명이었다. 나는 순희와 급장과 부급장으로 함께 일했다.
중학교에서 가장 힘든 수업은 농장에서 일하는 실과 과목이었다. 봄에는 참외와 수박과 토마토를 심고, 여름에는 모내기를 하고, 가을에는 벼를 베어서 탈곡기로 타작도 하였다. 남학생은 둘이 한 조를 이루어 변소의 똥오줌을 나무통에 퍼담아 메고 300여 미터를 떨어진 농장으로 날라 거름으로 주었다. 똥통을 메는 것이 싫어 우리는 교가 마지막 구절 ‘날로 새론 나의 집 합천중학’에서 마지막을 ‘합천똥통’으로 불렀다.
2학년 때는 영어 선생님이 없어 영어 시간이면 가까이 있는 함벽루涵碧樓에서 자습을 하곤 하였다. 신라 고성 대야성大耶城 아래 남정강변 벼랑에 있는 신라 고찰 연호사烟湖寺와 이웃하고 있는 함벽루는 발아래 강이 흐르고 건너 백사장에는 버들밭이 길게 늘어선 곳에 세워진 아름다운 누각이다. 낙숫물이 강물로 바로 떨어지는 조선 유일의 누각이라 명성이 높았다. 우리는 누각 마루와 난간에 앉아 돌아가며 한 줄씩 영어책을 읽었다. 강 건너 신작로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부산 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K 고교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려 보았다. 나는 그날 자습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며 순희에게 부산에 있는 K 고교를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순희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진주에 있는 J 사범학교를 꿈꾼다고 했다.
내가 부산의 명문 K 고등학교를 꿈꾸게 된 것은 정말로 꿈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산 너머 사는 친척 대학생이 우리 집에 왔다. 그 대학생은 어깨에 금장으로 된 견장을 달았고 가슴에 세로 지퍼가 달린 교복에 월계수 잎이 둘러 진 배지를 달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그 대학생은 최고 명문 S 법대 학생인데 판사가 되기 위해 고등고시 공부를 한다고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미래의 희망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지난겨울 그 대학생이 떠올라 S 법대를 가서 판사가 되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의 꿈에 놀라면서도 S 법대를 가려면 우리 지역의 최고 명문 부산 K 고교를 가야하고 K 고교를 가려면 같은 계열 K 중학을 가야 한다고 하며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K 중학을 가기 위해 준비했지만 가정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K 중학은 가지 못했다.
중학 3학년 때 해인사로 2박 3일의 수학여행을 갔다. 트럭을 타고 해인사로 가서 팔만대장경을 구경하고 가야산에 올라 정상 바위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그날 밤 우리는 홍류동 계곡 사하촌에 큰 소나무가 지붕을 뚫고 서 있는 초가집 여관에 들었다. 저녁밥을 먹고 남포 등불을 밝히고 마당에 편 멍석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어머니 마음>을 부를 때 순희가 눈물을 흘리다가 노래를 멈추는 것을 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