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해인사 홍제암과 사명대사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가야산 내에서 백련암, 홍제암, 원당암이 가장 유서 깊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초창연대는 알 수 없고 1731 영규(靈珪)가 지은 영자전 상량기에 의하면 1614년에 사명대사의 입실제자인 혜구(慧球)가 시창(始創)하였고 1656년, 1731년, 1770년, 1938년에 걸쳐 제 5차의 중수를 하였는바 그 당시 감원은 大山스님이었으며, 1944년부터 이차성화상이, 1955년부터 최창일 비구니가, 1960년부터 이태정 사주가 각각 감원으로 있었다.
1963년부터 종성스님이 감원이 되어 도괴직전에 있는 큰 방채를 중수할 원을 세우고, 먼저 사명대사의 비단을 정돈하고 동분서주하며 일단 본 암을 지방 문화재로 등록시켜 경상남도에서 연차 계획을 수립하여 1977년도에 이천만원, 1978년도에 삼천만원의 예산계획을 수립하여 공사 중인데 1977년 5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배차 이곳에 왔다가 공사 현장을 보고 호국성사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니 주변을 성역화하고 부분적 보수를 할 것이 아니라 국고로서 한꺼번에 수리토록 지시하여 경남도의 연차계획을 중단하고 완전 해체하여 보수하는 한편 서쪽 밭에 부속 건물 서래각(西來閣) 60평도 동시에 신축하여 일신 중수하게 되었다. 이 암자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인 사명(四溟)스님이 주석하다가 입적한 곳이므로 홍제암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조선조 영조때 극락전 옆에 표충사를 짓고 사명스님의 영정을 봉안 하였다가 밀양의 표충사와 중복된다하여 없애고, 영정은 이 암자 동쪽 청루에 봉안하였으므로 영자전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명(寺名)을 처음으로 영자전이라 부르다가 사명대사가 자통홍제존자란 시호를 받은 이후로 홍제암이라 부르고 있다.
먼저 사명대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장수인 가코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임진왜란에 참전해 울산성을 장악하고 있을 때 사명대사(1544~1610)가 긴 수염을 휘날리며 성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적장인 그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다. 일본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임진왜란 때 함경도까지 내달렸던 적장 가토도 승병을 일으켜 신출귀몰하며 왜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사명대사다. 마주앉은 두 사람 가토가 물었다. “조선에 보물이 있습니까?” 사명대사가 이어받는다. “우리조선에는 없고 일본에 있소!” 가토가 당황해하며 되묻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명대사가 목에 잔뜩 힘을 주며 답한다. “지금 우리조선의 보물은 네 놈들이 모두 가져가고 없소. 이제 조선에서는 가토의 목을 베어오는 것을 보물로 삼고 있으니 보물이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겠소!”라고 말해 가토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54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임응규는 5살 때 어머니를 6살 때 아버지를 잃은 후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야설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출가하자 걱정이 되었던 누이도 함께 출가했다고 한다.
밀양에서 김천으로 가는 동안 또 다른 2명의 여인이 응규의 풍채와 모습에 반해 함께 스님이 되었는데, 그의 곁에는 늘 비구니 셋이 따라 다녔다고 한다. 그 바람에 직지사에서 쫓겨나는 속환(俗還)처분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야설에 불과하다.
승려가 된 응규는 묘향산 보현사의 휴정 서산대사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자신은 사명대사가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전국에서 백성들이 유린당하자 “내 나라 내 민족이 없으면 부처가 되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며 승병을 모집한 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왜군을 격퇴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의 부름으로 1604년 일본에 사신으로 떠났다. 여기서 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일본에서도 이미 사명대사의 존재는 잘 알려져 있었던터라 그 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깍듯하게 모시며 대접 했지만 일본 측은 대사가 잠자리에 들자 밖에서 철문을 잠그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이미 낌새를 눈치 챈 대사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얼음빙(氷)’자를 써서 깔고 앉아 있었다. 완전히 타 죽은 줄 알고 문을 연 일본인들은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채 앉아 있는 대사를 보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적진에 들어가 강화조약의 주도권을 잡은 대사는 임진왜란 때 잡혀온 조선인 3천명을 데리고 귀국하는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최고의 칭송을 받는다. 대사는 귀국하자마자 묘향산을 찾아가 입적한 스승 서산대사의 영전에 명복을 빌고 노후 안식처를 찾아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왔다.
옛날 고승들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지낼 곳의 사찰을 찾아 기거하곤 했다. 이 땅은 통일신라말엽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도 탐낸 가야산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십승지 마을로 주목 받아온 합천 가야 만수동 일대다. 사명대사는 해인사 옆 진대밭골에 은거하며 수도하다 결국 병환으로 1610년 8월26일에 입적했다. 후에 국왕은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고 크게 나라를 구한다는 뜻을 담은 ‘홍제’를 따와 이 암자를 홍제암으로 불렀다.
대사 입적 2년 후 1612년 허균이 비문을 짓고 한석봉이 글을 쓴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 이 비문에 사명대사와 가토기요마사의 담판 내용이 담겨 있는데, 1943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합천경찰서장 다케무라(죽포)가 이 비석을 찾아내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부쉈다.
이때 명을 받고 깨뜨린 한국인은 사흘 만에 왼쪽 눈이 멀었고, 다케무라는 통영서장으로 영전되어 갔으나 일주 일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전한다. 4조각이 난 채 나딩굴던 비석은 1958년 해인사 정동원 총무스님이 붙여 다시 세웠고,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이 비석 옆에는 같은 모양의 비석을 하나 더 세워 부서진 대사의 비석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다.
이 비석군 뒤쪽 산기슭으로 약 50m오르면 사명대사의 부도가 처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홍제암 본체 건물은 특이한 ‘공자형(工字型)’건물로 대사가 거쳐 했던 방과 마루인 홍각 그리고 영정이 있다.
사명대사의 유물등 대 부분은 입적 100년후 같은 밀양 출신의 태허스님이 모두 밀양으로 가져가 표충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일본인들이 사명대사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홍제암의 큰스님은 요즘도 일본 관광객이 해인사에 많이 오는데 홍제암에 들러 사명대사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 합장하여 경의를 표한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모처에서도 사명대사를 기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 있는 대사에 대해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홍제암 큰스님은 지금도 매년 음력 8월26일 사명대사의 기일을 맞아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