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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묘 방문 의절사의 사육신 얼을 배운다 – 곽노연 인·서예가·대병대지生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노량진 사육신 묘에 오르는 언덕에는 도시의 소음이 어느새 멀어지고 늘 고요함만 남는다. 봄이면 벚꽃이, 여름이면 초록이, 가을이면 핏빛 단풍이, 겨울에는 하얀 눈이 덮이는 그 언덕에는 오래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는 오백여 년 전, 나라의 도리를 지키고자 했던 여섯 충신의 피눈물 어린 숨결이 스며 있다. 이곳에는 조선의 절의(節義)가 잠들어 있고, 그 중심에 있는 의절사(義節祠)는 세월을 견뎌온 충절의 상징이자 백성의 마음이 깃든 성역이다.
1455년, 세종의 손자 단종의 왕위가 찬탈되고 세종의 아들 세조가 권좌에 올랐을 때, 조선의 하늘은 피로 물들었다. 충절을 지키고자 했던 여섯 충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는 모두 그들의 선택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하늘의 뜻보다 백성의 정의를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하늘 뜻 거슬러도 백성 마음 따르리라.” 그들의 피는 한강을 붉게 물들였고, 이름은 역사의 심장에 새겨졌다.
형장의 이슬이 되기 전, 성삼문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그의 말은 스스로의 운명을 예언한 듯, 눈 속에서도 푸르른 소나무의 혼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박팽년은 시조 속에서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 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임금에 대한 충정을 잃지 않았다. 그들의 시조는 더 이상 단순한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생의 끝자락에서 터져 나온 진심이자, 의리의 절규이며, 역사를 향한 유언이었다.
거열형을 당하고 효수된 이들의 시신은 처참히 흩어졌으나,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한 이가 있었다. 생육신 김시습이 새벽 어둠을 틈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한강을 건너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사육신 묘의 시작이었다. 그 후 200년이 지나 숙종은 충신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세웠고, 정조는 신도비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 지금은 ‘사육신공원’이라 불리며 수많은 시민이 찾지만, 이곳의 땅 아래에는 오랜 슬픔과 의리의 무게가 잠들어 있다.
비각 앞에서 발을 멈추면, 노량의 바람이 살며시 스쳐 간다. 그 바람은 마치 속삭이듯 말한다.
“우리가 지킨 것은 왕이 아니라, 나라의 혼이었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그러나 의절사의 바람은 여전히 옛 향기를 품고 있다. 누군가는 이곳을 단순한 역사 유적으로, 또 누군가는 산책길의 쉼터로 여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그 안에 깃든 ‘의(義)’에 있다. 그들은 이익보다 신의를, 안락보다 정의를 택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충성’과 ‘의리’가 낡은 단어처럼 들릴지라도, 이 언덕에 오르면 깨닫게 된다. 진정한 충절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을. 나는 의절사의 계단을 내려오며 문득 묻는다.
“만약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그들처럼 의를 지킬 수 있었을까?”
그 물음은 내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단단히 세운다.
사육신의 삶은 우리에게 ‘옳음’을 지키는 용기를 가르친다. 그 용기는 권세나 명예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신념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봄이 오면 다시 벚꽃이 피고 겨울이면 눈이 쌓일 것이다. 그러나 충혼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노량진 언덕에 부는 바람 속에서 나는 느낀다. 사육신의 얼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양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이름들이다. 그들의 맑은 뜻은 세월을 넘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