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화음공(花陰公)과 악견산성(岳堅山城) – 권해조(權海兆) 논설위원(복야공파 삼괴당계 36세손)
화음공(花陰公: 23世)은 안동권씨 복야공파로서 삼괴당(三槐堂 : 20世) 휘(諱) 시민(時敏)의 증손(曾孫)으로 휘(諱)가 양(瀁)이며, 자(字)는 경지(景止)이고 호(號)가 화음(花陰)이다. 호조정랑 휘(諱) 일(逸 : 21世)이 조고(祖考)요,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 휘(諱) 여겸(汝謙 : 22世)이 선고(先考)로, 1555년(명종 10년)에 삼가현 대평리(현 대병면 죽전마을)에서 출생하여 1618년(광해 10년)에 64세로 고종(考終)하였다.
삼괴당공파 세보에 의하면 효행으로 별제(別提)와 임진창의(壬辰倡義)의 공으로 장수, 현풍현감을 지냈고 운명 사흘 뒤 성주목사 제수 교지를 받았다. 합천 임란사(壬亂史)에 의하면 공은 어릴 때부터 총명 비범하고 효행이 출중하여 향촌의 모범이 되었고, 옥계(玉溪) 노진(盧禛) 문하에서 수업한 다음 내암(來庵) 정인홍 선생 문하에 입문하여 공부를 하다가 임란 중에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임란 당시 악견산성의 축성과 왜군을 무찌르는 데 공이 지대하였다.
악견산성(岳堅山城)은 경남 합천군 대병면 성리(城里)에 있다. 악견산은 해발 492미터로 정상이 서울 도봉산같이 험준한 바위 절벽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삼국시대와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산성 전면은 너른 분지로 중심 마을이 대밭골(竹田)이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아 화살을 만드는 고을로 삼가현(三嘉縣) 시죽촌(矢竹村)으로 불렀다. 죽전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1545년 을사사화 이후 시조 후 21세 일신정(日新亭: 逸) 선조가 호조정랑을 끝으로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후손들이 570여 년간 이곳에서 세거해 왔다. 필자는 죽전마을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소 먹이고 나무하며 하루에도 한두 차례 악견산성을 오르내렸다.
악견산성에 대한 역사 기록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고려사에 약간 언급이 있어 신라와 백제가 싸웠던 대야성(大耶城) 전투와 연관된 것 같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명대사 유정(惟政),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약봉 서성(徐渻) 등이 기록되어 있고, 삼가읍지, 합천군사에는 일신정 공의 손자인 23세손 화음공 양(瀁) 형제의 기록이 전설처럼 실려 있다. 기록에 의하면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休靜)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았으며, 산성 축성에 관심을 가지고 합천 야로면 소재 이숭산성(李崇山城)과 함께 악견산성을 보수하였다 한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도 임진왜란 때 성주목사를 하면서 악견산성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였고, 서거정의 현손 약봉(藥峯)도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감사로 악견산성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삼가읍지 훈공조(勳功條)에 의하면 권양(瀁)은 임진왜란 당시 형인 해(澥)와 같이 창의(倡義)하여 악견산성을 방어하며 왜적을 무찌른 공이 많아 목사의 벼슬을 하였다. 합천군사(陜川郡史) 인물과 성씨 난, 효행 편에 보면 권양의 호는 화음이요, 예빈별제(禮賓別提)를 제수받았으며 임란에 기병하여 적을 섬멸하고 삼가 악견산에 둔병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공로를 조정에서 알고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제수하고 연이어 장수, 현풍현감과 성주 목사에 제수하였으며, 가야면 소재 회산서원(檜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의 선친 설암(雪嵒: 玉鉉) 문집 악견산성 고적기(古蹟記)에 보면 국사(國史) 및 야사(野史), 여러 대가(大家)의 행장(行狀) 등 기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악견산은 높고 험하여 돌이 쌓여서 된 봉우리가 땅에서 우뚝 솟아나 하늘에 닿으려는 기세가 있다. 엄숙 장중하게 대장(大將)이 깃발과 북을 세우고 군사를 호령하는 듯하고, 높고 우뚝한 지주(砥柱)가 물 가운데 버티고 서서 황하를 막고 있는 듯하다. 아래서 보면 높은 바위와 절벽이 둘러져 험준하여 올라가지 못하게 보이지만, 정상은 넓고 평평하여 수천 명의 병마를 수용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다. 절벽의 허술한 곳을 따라 돌을 쌓아 성곽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악견산성이요 그 길이가 이천여 척이나 된다.
악견산성은 신라 때 죽죽(竹竹)과 용석(龍石) 두 장군이 죽음으로 지켰으며, 조선 선조 때 경상우도 순찰사 서성(徐渻)이 그곳을 지키기 위하여 군사를 주둔시켜 쌍충묘(雙忠廟)를 건립하여 사민(士民)을 격려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음공(瀁)이 의병을 일으켜 중형 판관공(判官公: 澥)과 이곳에 웅거하여 사수했으며, 망우당이 악견산에서 불과 4~5 마장에 이르는 인접 산 금성산(錦城山: 해발 592미터)에 와서 진을 치고 힘을 합하여 적군을 토벌하였다.
특히 화음공 형제는 왜군이 거창에서 가치(架峙)를 넘어 고현등(古縣嶝)에 주둔하여 성을 엿보고 있을 때, 악견산 정상에서 금성산 꼭대기와 새끼줄을 도르래로 연결하여 붉은 염색을 한 장수복 허수아비를 매달아 공중에서 왔다 갔다 하게 당김으로써 적을 놀라게 하는 묘한 계책을 사용하여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달밤에는 흡사 입으로 불을 토하는 형국의 신장(神將)이 양손에 창과 칼을 들고 이 산 저 산으로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여, 적군은 무서워 넋을 잃고 다른 길로 도주했다. 화음공 형제는 이곳에서 웅거하며 지역의 보장(保障)이 되었으니 그 충의(忠義)가 옛날 제(齊)나라 즉묵(卽墨)과 당나라 수양(睢陽)에 견줄 만했다. 후인들은 악견산성에 올라 이분들을 생각하며 충의를 기려야 마땅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곽은 수원성, 위례성과 같이 200미터 정도 낮은 지형에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악견산성은 서울의 남한산성과 같이 높은 고지 천애의 요새지에 구축된 성곽이다. 악견산성 성곽(城廓)은 원래 3선으로 축성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총 길이 2천 2백 척이라 하여 약 730미터쯤 된다. 성곽은 악견산 중턱과 정상 주요 접근로에 암반을 연결하여 구축되어 있다. 기단부(基端部)는 큰 돌로, 상단부는 작은 돌로 쌓았는데 상단부 협축 부분은 일부 도괴된 상태다. 축조 수법이 조선 시대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양호한 석축 높이는 평균 3미터로서 당시 선조들의 석조 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악견산성은 1988년 8월 3일 경상남도 기념물(당시 합천군 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필자는 유년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악견산성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현대적 군사 식견을 갖춘 군인으로 전역한 지금 생각해보니 이곳이 비록 변방이긴 하지만 중요한 군사 요충지다. 웅장한 악견산은 뒷면에 향강(香江: 합천댐)이 흘러 배수진 형성에 용이하고, 남쪽 허굴산(虛崛山: 해발 681m), 서쪽 금성산(592m)과 삼산(三山)으로 둘러싸인 해발 300미터 이상 고지대 분지인 대평 들판은 식량 조달과 보급 기지로 활용하기에 충분하였다. 6.25 전쟁 때에도 1950년 7월 25일 밤, 악견산과 금성산의 연결 지역인 여순목 일대 고지 길목에 미군 1개 대대 병력이 전차와 화포를 배치하여 북한군을 퇴각시킨 바 있다.
최근 악견산성 우측 하단에 합천댐이 건설되고 그 옆에 임란 창의기념관(壬亂 倡義 記念館)이 건립되었다. 기념관 건립에는 당시 합천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권해옥(權海玉: 36대손) 족형의 역할이 컸다. 기념관에는 임란 당시 합천 지역에서 싸우다 순국하신 110위의 영령들이 모셔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400여 년 전 일본과 싸웠던 역사를 되돌아보고 오늘의 한일 관계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권양, 권해 우리 선조들이 용감히 싸워 공적을 세웠던 악견산성이 새로 건립된 임란 창의기념관과 더불어 불후의 성역으로 가꾸어져, 후손들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역사의 산교육장이 되길 기대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