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베네수엘라에서 본 차베스의 꿈과 마두로의 현실 (3) – 여류 이병철 시인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상
-석유의 재앙과 포퓰리즘/
이곳에서 포퓰리즘의 실패는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국가가 나눠주던 삶에 익숙해졌고, 스스로 만들고 책임지는 구조는 자라나지 못했다. 생산은 멈췄고 유통은 붕괴됐으며, 사람들은 줄에 서는 법만 익혔다.
현지에서는 “석유가 국민을 타락시켰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막대한 석유 수익을 자립 체계 구축이나 기간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한 결과였다. 석유 수익으로 해외에서 대부분을 수입하는 나라, 농사를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농촌, 제대로 된 관개 시설조차 없는 넓은 땅. 석유와 시혜적 정책에 기대어 국민 다수가 자립의 필요성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불행처럼 느껴졌다.
차베스 시절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마두로 정권에 이르러 더 깊고 더 넓게 퍼져 있었다. 석유는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자원이었지만, 결국 국민을 의존에 길들인 독이 되고 말았다.
전등 없는 밤, 머물던 방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화장실에는 휴지도 비누도 없었다. 연구소와 연계된 명상센터로 갈 때는 쌀자루를 챙겨가야 했다. 마트에서 쌀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박한 삶의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가 멈춘 상태였다. 긴 줄과 빈 진열대, 삼중의 철망과 탈출 행렬은 그 결과였다.
-민중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배신에 대하여/
베네수엘라와 그 뒤의 쿠바를 다녀온 뒤, 내게 남은 것은 깊은 허탈감과 분노였다. 이 두 나라를 방문하기 전, 나는 다른 어떤 나라를 갈 때보다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차베스 정권과 협동조합적 사회주의를 성공 사례로 소개하는 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협동조합 운동에 깊이 관여해 온 나로서는 그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농민운동을 하며 70년 대 중반에 우리 지역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는 일에 참여했고, 이후 한살림운동과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통해 생협 운영과 확산의 현장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런 경험과 문제의식으로 찾은 현장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민중의 이름으로 포장된 체제의 붕괴였다.
그 체험은 내가 한때 꿈꾸고 지향해 왔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관념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통절하게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민중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민중을 배신한 권력, 그리고 그것을 정파적 이해 속에서 미화하고 소비하는 태도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개입에 대해/
나는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개입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이자 국제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차베스와 마두로 정권의 독재와 국가 파산, 민중에 대한 배신 역시 지지할 수 없다.
이번 사태를 진영 논리로만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나는 이 오래된 기억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번 개입은 독재자나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중 대립과 세계 권력 재편 과정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사태는 새로운 패권 경쟁의 일부이자, 현존 문명 질서의 균열을 드러내는 징후처럼 느껴진다.
다만 이 기억 그 체험을 통해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는 나눠주는 것으로 시작할 수는 있어도, 자립의 토대를 만들지 못하면 결국 국민을 배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베네수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과 양극화 속에서 우리 사회 또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이 나눠주느냐의 경쟁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차베스 정권의 협동조합적 사회주의 이론을 제시하고 정책 자문을 했던 프라우트 연구소 소장 마헤슈와난다 다다지는, 마두로 정권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미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려 투옥됐다. 우리가 베네수엘라를 떠난 직후의 일이었다. 그로 인해 다음 해(2017년) 원불교 10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에서 같은 세션의 발표자로 만나기로 했던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정책 비판이 곧바로 투옥으로 이어지는 현실은, 이 체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오랜 기억을 다시 소환한 소회를 나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