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먼 북소리(2) 아버지를 품은 60년 전 목기함(木器函) – 최효찬 작가, 수필가. 문학박사
지난해 11월 말, 묘사를 하루 앞두고 여름에 수리한 재실 청소에 나섰다. 새로 교체한 반침 창을 열고 오래 묵은 물건들을 꺼내던 중, 구석진 곳에 작은 궤짝이 눈에 띄었다. 꺼내보니 제기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고, 나무상자에는 글씨가 남아 있었다. 낯익은 필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버지의 친필이었다. ‘木器函’이라는 큰 글씨 아래에 ‘丙午 元旦 管理者 崔雲煥’<사진>이라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순간, 어린 시절 제사를 지낼 때마다 보았던 바로 그 목기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유는 잘 알 수 없으나 1987년 본가가 수몰되면서 재실로 옮겨진 것 같았다. 낡고 파손된 상자였지만, 아버지의 친필을 마주하니 마치 다시 뵙는 듯한 아득한 기분이 밀려왔다.
아버지는 60년 전인 1966년, 병오년 설날 아침에 이 목기함을 손수 만들고 글씨를 적었다. 글자에는 단청처럼 문양을 넣어 테두리를 두르고 밑줄을 그어 돋보이게 했다. 작은 상자 하나에 온 정성을 쏟은 것이다. 목기함은 단순한 그릇을 담는 상자가 아니라 유교적 가치를 품은 상징이다.
목기함을 만든 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이주하려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산으로 떠나던 날 아침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당시 부산은 아침 8시 버스를 타면 8시간 걸려 조방 앞 터미널에 도착했다. 1968년 초가을에 고향 집을 떠난 아버지는 동래에서 한약방을 하던 종형 집에 기거하며 임시직으로 우체국에서 일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방을 함께 썼던 울산의 재종형(당시 고등학생)은 아버지가 국제우편 업무로 인해 영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이듬해 정월대보름(3월3일) 할머니 제사를 모시기 위해 귀가하셨다. 그때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손꼽아 기다렸던 우체국 합격 통지서가 이름이 비슷한 이웃 동네 사람에게 잘못 배달된 것이다. 이를 뒤늦게 알았을 때는 합격이 취소된 후였다. 부산 이주로 인생 2막을 설계하던 아버지의 꿈은 그렇게 좌초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목기함이 결국 아버지를 다시 고향에 붙잡아 놓은 셈이다.
연암 박지원은 35세에 과거 공부를 접고 실학 공부에 매진했으며, 40대 중반에 《열하일기》를 썼다. 50세에 관직에 나아가기 전까지 15년 동안 가난 속에서도 나름 인생 2막을 보냈다. 이후 65세까지 15년 동안 관직을 지냈다. “아깝다. 벼슬살이 10여 년에 한 부의 훌륭한 책을 잃고 말았구나.” 연암은 처자의 굶주림을 보다 못해 종9품 말단 관직에 나아갔지만 더 이상 걸작을 쓰지 못했다. 당대의 ‘셀럽’인 연암도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셈이다.
아버지 또한 자신의 꿈도 중요했겠지만,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부산 이주를 결심했을 것이다. 1녀 4남의 장녀인 누님은 초등 학력이 전부다. 최근에야 누나에게 왜 아버지께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여쭙지 못 했느냐고 물었다. 누나는 당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들려주었다. “내가 실패를 하는 바람에 우리 집 고명딸을 중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미안타.” 아버지가 말한 ‘실패’는 부산 이주가 좌절된 일을 뜻한다. 오 남매 중 가장 뛰어난 아이였던 누나는 그 실패의 희생자인 셈이다.
아버지는 농경사회와 유교문화의 세계 속에서 사셨고, 나는 그 오랜 문화의 끝자락에 서 있다. “인생은 비약과 도약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고 의견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진화한다.”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속 문장처럼, 인생은 시대에 맞게 단계적으로 진화하면서 이어진다. 요절한 어머니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폭설을 뚫고 귀가한 아버지의 선택은 유교적 가치를 우선시하던 시대상에 충실했던 것이리라. 연암이 36세 때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실학에 매진한 것, 아버지가 33세 때 목기함을 제작한 것 모두 그 시대에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 또한 어느 정도 아버지의 경험과 진화의 단계를 이어받아 삶을 펼쳐온 셈이다.
최대 명절이라는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새해 병오년 원단은 아버지가 목기함을 만들던 60년 전 병오년 원단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설날이면 동네를 돌며 세배를 다니던 풍속은 거의 사라졌다. 기제사와 묘사 의례도 지속 가능성이 위태로운 실정이다. 묘사 떡을 먹기 위해 산길을 쫓아다니던 추억은 베이비붐 세대에 이르러 마지막 유산으로 남았다. 이들은 수천 년 이어온 농경문화의 최후 세대가 되고 있다는 당혹감마저 느낀다. 인간의 경험과 기억은 세대를 이어 펼쳐지는 진화의 산물이지만, 이제 단절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재실 반침에 방치된 채 오랜 침묵을 견뎌온 목기함은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을까. 지금 흥하는 삶의 양식조차 여차하면 아버지의 목기함과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이 아닐지.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든 지금, 낡은 목기함은 이제 조용히 우리 곁을 지키는 문화의 동반자이자 과거와 현재,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문화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