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늬 – 문경자 수필가
설날이 가까워지니 그리운 얼굴들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평소에는 까맣게 잊었던 동그란 얼굴, 세모난 얼굴, 네모진 얼굴, 길쭉한 얼굴, 일그러진 얼굴, 화난 얼굴, 웃는 얼굴, 행복한 얼굴, 눈물을 흘리던 얼굴. 세상 사람들의 얼굴형상을 그려본다. 눈물 한 방울 또르르 굴러 양 볼을 타고 내려와 방바닥에 떨어져 흩어진다. 눈물 속에 피어나는 꽃무늬처럼 그 안에 온갖 기쁨과 슬픔 행복 희망 절망과 같은 사연이 있다. 사람마다 다른 세상을 살지만 때로는 좌절을 하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 때로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의 삶이고 나의 삶이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우리는 열심히 일하며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걸어가는 길 앞에는 즐거움과 슬픔이 있을 수도 있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다. 모두 사는 것은 비슷하다. 나만 이렇게 사냐? 나만 왜? 하고 한숨을 쉬는 순간은 멀리 보내고 나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먼저 웃으며 인사하고 손을 내민다. 잡은 손의 온기와 냉기가 서로서로 따스함과 차가움을 주고받는다. 맑은 눈빛 입가에 미소가 정답다. 미운 사람, 예쁜 사람, 거친 사람, 모두 다 행복한 순간 세상은 밝다. 보기 싫어도 마주하고 옷깃을 스치며 안아주는 순간 기쁨이 가득하고, 내 맘속 깊은 곳 옹달샘처럼 맑은 샘물. 자로도 잴 수 없고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도 알 수 없는 오직 마음속에만 살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이 모이는 설에는 차례를 지내고 덕담을 나누고 세배를 드리고 용돈도 주고받는다. 어릴 때는 설이 오면 배불리 먹고 맘껏 뛰어놀며 산과 들에 내린 눈을 밟으며 뽀드득 하는 소리가 좋았다. 부모님 손잡고 작은아버지 어머니께 세배를 하러 가는 길은 즐거운 날이었다. 엄마는 밤을 새우며 열심히 가족들의 옷을 만들었다.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해서 자는 게 겁이 났다. 혹시 산신령처럼 되면 얼마나 창피할까! 친구들의 놀림을 생각하며 억지로 엄마의 곁에 누웠다. 눈이 자꾸 감겨서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우리 깅자 눈썹이 하얗다. 우짜겠노 밖에도 몬나가고 큰일 났데이” 엉엉 울면서 방에 있는 거울을 보니 눈썹이 하얗다. 엄마는 밀가루를 발라 놀려 주려고 했다며 모두 웃었다. 어른이 되어도 설날이 오면 즐거운 추억을 떠올렸다.
친척들은 없는 살림살이라 해도 최선을 다해 이웃들과 정을 나누고 서로서로, 새해 복 많이 받고 걱정없이 살게 해 달라고 했다. 맹물에 집간장을 넣고 파를 넣은 떡국 맛이 일품이었다. 농사를 지어 만들어준 것이라 맛있었다. 너도 나도 가난하게 살았지만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새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는 날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설날은 어린이들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들도 이날만큼은 더 행복하고 여유를 가지고 이웃 간의 못 다한 얘기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위로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함께 축하를 하였다.
설날은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한다. 나이를 먹든 말든 새해는 누구에게나 희망의 등불이 된다. 마음자세가 달라지니 하는 행동도 다르게 된다. 사람은 마음먹은 대로 살아 간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고 눈물이 나도 그때를 잘 헤쳐 나가면 좋은 일들이 생긴다. 그러한 일들을 많이 겪으면서 살아 가는 것이 삶의 길이다. 누구는 어쩌고 저쩌고 그런 말을 해도 나아 갈 길은 내가 정한다. 맘이 외롭고 울적할 때는 스스로 헤쳐 나아갈 방향을 터득해야 한다.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다. 어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배워야 하는 게 인생길이다. 인생은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못할 마지막 길인데 그 길에는 알 수 없는 길이 많다.
100세 시대가 왔다. 돌봐 주지도 않으면서 부모를 미워하는 자식들도 있다. 주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부모에 대한 마음이 얼음장 같았다. 나를 낳고 길러 주신 부모님, 열 자식이 다 싫다고 서로 미루며 싸움을 한다. 부모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 이런 꼴 안 보고 죽는 게 나아’ 하고 자식들 몰래 눈물을 흘린다. 누구에게 사정을 말로 다 하고 살 수가 있나 생각해 보면 평생을 살아온 길은 자식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자식들은 그저 부모에게 무엇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반면에 그러지 않은 자식들도 있다. 욕심을 버리지 않고 나의 욕심을 채우자 하는 맘이 들어 원수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자식은 울타리다. 그 울타리가 잘 지탱해주면 걱정이 없지만 그것이 끊어져 부서지면 부모와 자식들 사이에 금이 간다. 차례와 손님 접대 용돈 준비에 어른이 되고 보니 걱정만 수북하게 쌓인다. 경제적인 요인도 있지만 우선 마음이 편치 않으니 무거울 수밖에 없다.
설날에는 서로 웃으며 지나간 일들은 다 묻어두고 부모님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 행복하자. 세배를 드리는 순간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들에게 좋은 관계를 이어주는 새해다. 떡국을 끓여 나누어 먹고, 서로의 미운 감정이나 쌓였던 것들은 멀리 보내고 웃음이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자. 각양각색의 꽃 여러가지 모양의 얼굴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간섭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일도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좋은 생각을 하면 세상이 봄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마음에도 예쁜 정원을 가꾸자. 거창하게 꾸미지 않아도 소박하게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코스모스, 해바라기, 진달래같은 꽃을 심어보자. 사계절 얼굴도 마음도 웃음이 피어날 것이다. 보는 사람도 그 향기를 맡아 어느 사이 맑고 고운 꽃송이가 매달릴 것이다.
올해 설날은 양력 2월 17일이다.예전의 풍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저마다의 즐거운 설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따뜻하다. 이날만큼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듬뿍 담은 소원을 각자 빌어본다. 집집마다 구수한 떡국을 끓여 떠들썩하게 먹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내 맘에도 많은 꽃씨를 뿌려 웃음꽃이 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해 인사를 모든 분들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