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설 날

강병률
전 합천초등학교교장

병신년(丙申年) 새해 아침 설날이 밝아온다. 까치 까치 설날과 우리 우리 설날이 붉은 해돋이를 연출하며 한 해의 시작을 알린다. 며칠 전 겨울철의 마지막 절기인 대한(大寒) 무렵에는 지구촌 곳곳을 강타한 맹추위와 폭설로 고립과 생활 불편, 심지어 생사의 긴장감 까지 주기도 하였지만, 양력 2월 4일이 입춘(立春)이고 19일이 우수(雨水)이니 봄의 절기가 시작되었고, 새봄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설날이 온다. 설날은 정월 초하루를 말하고 설명절은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를 말한다.
정월 초하루 설날을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설이라고 한다. 설은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한다”는 뜻이다. 설날 아침에는 설빔으로 갈아입고 정초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가 끝나 세배를 올리고 떡국으로 마련한 세찬(歲饌)을 먹으며 어른들은 세주(歲酒)를 마시고 덕담을 나누신다.
성묘길에는 조상의 묘소를 살피고 모처럼 만난 집안의 종형제 숙질간에 세상살이며 정치ㆍ경제 이야기, 집안 이야기 등으로 저마다 시론(時論)을 펼치기도 한다.
1896년 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 이 기준으로는 고종 32년)에 태양력(양력)이 수용되고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은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 이후로 일본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억압했다. 그들은 우리 명절 무렵이면 떡방아간을 폐쇄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먹칠을 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반면에 일본의 명절과 그 행사의 의식(儀式)을 한국에 이식하여 강요하기도 하였다. .
오락가락하던 우리의 설날은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되어 1일간 국가적인 공휴일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되고. 그 후 양력설 ,음력설, 이중과세 등 근세 정부 변천사에 따라 오락가락 했으나 오늘날 설날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로이 3일간의 연휴가 계속된다.
오늘날에 와서는 설명절의 세시풍속은 많이 달라지고 있으나, 어릴 적 설명절 풍속도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지난 시절의 설명절은 집안과 이웃, 남녀노소가 하나가 되고 소통되는 따뜻한 인간애가 담겨 있는 사람중심의 명절이었다.
나의 어릴 적 설날은 핫바지의 때때옷, 떡치는 소리, 검정고무신, 이발소에서 까까머리를 하고, 연날리기와 팽이치기로 해가는 줄 모르는 그런 풍경이다. 설을 쇠고 집집마다 설빔을 마련하기 위해 바느질, 다듬이질로 호롱불 밑 동지섣달 긴긴 겨울밤을 지새기도 하였다.
종가집(큰집)에는 4대 봉제사는 물론 설날 차례 준비를 위해 제상에 올릴 놋그릇을 닦기 위해, 큰집 작은집의 동서들이 모여든다.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기왓장을 콩고물처럼 곱게 부수어 볏 집에 가루를 묻혀 그릇을 돌려가며 수십 번 문지르고 닦으며 놋그릇이 반짝반짝 금빛이 되게 된다.
가래떡을 뽑기 위해, 큰머슴 작은머슴이 번갈아 가며 떡돌 위의 떡치는 소리가 멀리 동구 밖 까지 들린다. 집안 어른들이 강에서 돼지를 잡을 때는 돼지 오줌통(오줌보)이 축구공이 된다. 우리 편이 질세라, 겨울바람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마에 땀이 나게 뛰어 다녔다.
초하루 새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마루나, 부엌의 추녀 밑이나 대문간에는 등을 달아 집안을 밝히며, 설치레로 사다주신 고무신과 목다비(양말)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고 만지고 신어보다가는 밤잠도 설쳐 새벽에 잠이 쏟아진다. 어머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셨는지 떡국을 끓여 작은 상에 차리고는 참빗으로 곱게 빗은 비녀 꽂은 머리에 아주까리 기름을 살짝 바르시고, 곱게 한복으로 차려 입어시고는 이른 새벽부터 웃어른께 세배 드리려 나서신다.
흰두루마기 차림으로 종가집으로 모여든 설날 아침 차례상 앞으로는, 촌수가 높으신 어른부터 대청마루를 차지하시고, 조무래기 우리 아이들은 마당에 펴 놓은 멍석 위서 서서 멋모르고 제사가 빨리 끝나기 만을 기다렸다.
새 목다비(양말)로 갈아 신었는데도 발가락이 빠지도록 시려서 견디기 어려웠으나, 마치고 나면 큰엄마가 퍼주시는 떡국 한 그릇과 능금 쪼가리와 돼지고기 몇 모타리, 문어 꼬랭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나중에 사랑방에 큰아버지께 절을 하면 세뱃돈을 받는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며칠간 계속되는 동내어른들을 찾아뵙는 세배인사가 끝날 때이면 동네 어른들이 펼치는 풍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 한다. 징과 북, 상모를 돌려대고 집집마다 방문하며, 지신밟기 농악 놀이가 정월 대보름 까지 이어진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풍물패 뒤를 따라다니며 집집마다 내어놓는 떡과 막걸리를 나누어 먹고, 취흥에 겨워 춤사위를 이어가느라 하루해가 짧았다.
오늘날의 설명절 풍속도는 많이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한때 신정도 3일간 연휴로 하다가 다시 2일로 했으나, 1999년 1월 1일부터 하루의 휴일로 축소되어 3일 연휴인 설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을 전후하여 성묘하는 세시풍속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갖가지 세시풍속은 퇴색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다행히 근래에는 관련 사회단체나 언론 매체에서 설명절 분위기를 띄우는 행사와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등 민속과 관련이 있는 기관에서 민속놀이 판을 벌이고 이를 찾는 가족들이 날로 늘고 있다. 떡국을 끓일 가래떡을 기계로 빼거나 상품으로 만들어진 선물을 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아직 떡국을 명절식으로 하는 세시풍속도 전승되고 있다. 세월은 바뀌어 가도 꽉 막힌 귀성길 도로 풍경이 가족간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한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각 가정마다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운수대통(運數大通), 만사형통(萬事亨通),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등의 입춘축(立春祝)과 소원축(所願祝)을 붙여보는 정성된 마음으로, 가족들의 건강과 화목을 나눠보는 오붓하고 희망찬 한 해를 맞이하는 즐거운 설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나누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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