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에세이| 1. 배움, 그 지향 – 안병국 교수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통해] “배우고 때맞추어 그것을 복습한다면 역시 기쁘지 않겠느냐?”
<학이(學而)>는 『논어』 20편 중 제일 처음 등장하는 편명이다. 편명 <학이>는 별 뜻이 없다. 주자는 “첫머리의 두 글자를 따서 구별로 삼은 것(取篇首兩字 爲別)”이라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학(學)’과 ‘이而)’ 각 두 글자가 별 뜻이 없거나 문법적 역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주자는 ‘학(學)’의 말뜻을 “본받는다(效)”라고 풀이하고, “스스로 알지 못하고 능하지 못하기에 알고 능한 자를 본받는 것(己之未知未能 而效夫知之能之之謂也)”이라 했다. 즉, 내가 모르기 때문에 ‘아는 이’를 본받아 앎을 구하고, 내가 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능한 이’를 본받아 그 능함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논어』에 담긴 모든 것이 <학이>의 목적어일 수 있다. 그것은 공자의 정신과 덕행의 기본을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고, 효제(孝悌)와 충서(忠恕) 및 인(仁)의 도(道) 내지는 군자(君子)가 되기 위한 방법 등일 수도 있다.
‘이(而)’는 둘을 이어주는 어조사(語助辭)로 순접(順接) 접속사다. 한문에서 어조사는 실질적인 뜻이 없이 보조로만 쓰인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허사(虛辭)’라고 한다.
위 글의 ‘이(而)’는 “말이을 이”라고 훈독(訓讀)하는데, 영어의 “접속사(Conjunction)”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특정한 단어 하나에 고정되기보다는 문장의 흐름을 부드럽게 만드는 글자다. 문맥에 따라 순접, 역접, 인과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대학생들에겐 영어의 and, but, yet, while, still, then, therefore… 때로는 -ing나 with, 문맥에 따라 ‘Positive’하게 연결될 수도, ‘Negative’하게 꺾일 수도 있는 유연한 접속사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더 빠르다. 만약 ‘이(而)’가 없었다면 ‘학(學)’은 학대로 ‘시습(時習)’은 시습대로 따로 놀게 된다.
어조사는 글의 표현력을 높이는 도구로서도 중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문장 해석이 모호해지거나 뜻이 불명확해질 수 있다. 주흥사(周興嗣)는 어조사 ‘언재호야(焉哉乎也)’ 네 글자를 넣어 1천자 천자문을 완성했다.
‘시(時)’를 “때맞추어” 혹은 “제때”, “때때로” 등으로 해석한다. 우리들은 공부에 때가 있음을 알고 제때에, 때에 맞추어야 능률적인 학습이 된다. ‘매화도 한철, 국화도 한철’이라는 우리 속담은 “모든 사물은 저마다 한창때가 있다”는 뜻이다. 좋은 기회가 있을 때 서둘러 행동해야 한다. 서양 속담의 “햇볕이 뜨거운 날을 택해 건초를 말리듯(Make hay while the sun shines.)” 때가 있는 것이다. 좋은 시절도 그때가 지나고 나면 그뿐이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란 사람이 있었다. 6백여년 전 사람이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등으로 불렀다.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이기도 하다. 조선의 3대천재의 1인이라고도 한다.
김시습은 태어난 지 8개월부터 배우지 않고도 글을 알았다고 한다. 마침 이웃에 먼 할아버지뻘 되는 최치운(崔致雲, 1390~1440)이라는 학자가 살았다. 그는 예문관제학과 이조참판을 지낸 명신(名臣)이다. 최치운은 김시습의 재주를 보고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다. 그의 천재성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많다.
無雨雷聲何處動(무우뇌성하처동), 비는 오지 않는데 이 천둥소리는 어디서 울리나?
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김시습이 3살 때 지은 시라고 한다. 유모의 맷돌 가는 소리에서 천둥소리를 생각했고, 누런 콩이 갈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진다”고 표현했다.
‘시습’이란 그의 이름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명명되었다 한다. 자(字) ‘열경(說, 悅卿)’은 “불역열호(不亦說乎)”에서 ‘열(悅)’을 취하여 “벼슬하여 가문에 기쁨을 주라”는 뜻에서 ‘경(卿)’자가 덧붙여졌다 한다.
‘열(說)’은 ‘열(悅)’과 같은 의미다. 도올(檮杌)은 이 ‘열’을 “나의 실존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라고 보았다.
무애 양주동이 『논어』 ‘학이’의 글을 읽고 너무 밋밋하다고 말하였다. 그의 수필 <면학(勉學)의 서(書)>를 보면 이렇다.
열 살 전후 때에 논어(論語)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운운(云云)이 대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孔子) 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은 그 밑의 정자(程子)인가의 약간 현학적(衒學的)인 주석(註釋)에 의하여 다소 그 도(度)를 완화(緩和)하였으나 논어의 허두(虛頭)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印象)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 30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成就)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이 진리(眞理)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말 재주가 없는 사람이 말을 어렵게 한다. 그는 누구나 쉽고 이해가 쉬운 평범한 말을 쓰지 않는다. 그가 쓴 책도 그렇고 말도 그렇다. 『논어』 <위령공>편에도 “말은 뜻이 통[達]하면 된다(辭達而已矣)”고 하였다. 말은 뜻이 잘 통하고 잘 전달되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지 화려하게 수사(修辭)된 것을 잘하는 것으로 치지 않는다. 소동파는 글을 쉽게 쓸려고 노력한 이로 알려졌다. 그는 특히 윗 구절을 좋아하여 글을 쓰면 집 하인들에게 보여 주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고쳐 썼다고 한다.
『논어』의 내용 구성은 본 쉽고 평범하게 정의된 <학이> 장의 ‘배움’에서 시작해 마지막 편 <요왈(堯曰)>의 ‘하늘의 뜻을 아는 것(知命)’까지로 되어 있다. 신안진씨(新安陳氏, 陳櫟)는 이것의 배열을 두고 “첫 장과 끝 편의 마지막 장은 모두 배우는 자가 <군자되기>를 참된 마음으로 간절히 기대한 것(首篇首章末篇末章 皆拳拳以君子望學者)”이라 했다.
<학이>의 ‘학(學)’ 다음에 ‘배울 것’에 대한 목적어 없이 그냥 곧장 ‘이(而)’자로 이어졌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이(而)’ 자가 배움의 뜻인 학(學)이 어떤 공간으로 나아갈지 그 지향이 무한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