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이념과 산업화, 현대사의 새 장을 열게 한 세상을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1)
지금 창밖엔 봄바람 불어오니 나의 몸은 그래도 온기를 느낀다. 올해도 주말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 수영강변을 산책하며 고향의 소식을 듣고 건강관리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젠 직업적으로 이어져온 안부가 건강 관리에 안부로 대신한다.
고향의 인연으로 이어져온 친구들은 어느새 주름만 남아 거울에 비치질까 너무나 두렵다. 고향의 봄은 냇가에 푸른 잎이 돋아나고 노란 개나리꽃이 나를 반겨준다. 우리는 이러한 삶 속에서 행복의 가치를 사계절에서 느껴본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자연의 법칙이며 진리이다.
이러한 정신적, 물질적,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는 제반 활동을 인생이라 하며 또한 삶이라고 한다. 50년대에는 국가 예산의 절반 정도가 외국 원조에 의존하던 시기를 지나 60년대 1인당 GNP가 78달러 내외이던 그 당시 우리 우방국인 미국 국민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존재 자체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고, 세계 최빈곤 국가로서 그 당시 인간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살기 위해서 먹는다’라고 하였다.
국민들이 살기가 어려워도 정부는 저축과 절약 정신을 강조하던 시기로, 인간의 삶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는 능률성과 효과성, 생산성을 강조한 형이하학적 철학적 관점으로만 바라보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윤보선 대통령은 제1공화국 이승만 대통령 때 대통령제 중심제 하에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여 국정 운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제2공화국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8.13에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은 최초로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여 사실상 자유당계의 상징적 대통령으로서, 이승만 정부 때 1948.12.15 제2대 서울 자유시장과 1949.6.6 상공부 장관을 지낸 바 있었다. 형식상 행정 수반인 반면, 민주당계인 장면 총리는 실질적이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국정 운영에 마찰을 가져왔고,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게 되자 나라를 구하고자 박정희 소장 중심의 혁명군은 1961.5.16 군사 혁명을 일으켰다. 윤보선 대통령은 취임 후 약 1년 7개월 만에 하야함으로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박정희 혁명정부는 혁명공약대로 기아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1962년 제1차 경제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 당시 실제 연간 8.3%의 놀라운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고, 1996년까지 제7차 경제개발 계획이 이어져 오는 동안, 1960년대에는 신발, 의류 등 경공업이 발전하고 1970년대는 선박, 비료, 전력 등 중화학 공업국으로 놀랍게 성장 발전하여 한국 산업 근대화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3.8.30 예편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1963.10.15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윤보선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12.17 취임 후 추진 중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강력히 추진하였다. 1972년 전국 새마을 운동으로 농어촌의 환경 개선 및 소득 증대가 이루어지고, 월남 전쟁으로 1964년부터 우리나라는 연인원 32만 명의 월남 파병에 의한 희생으로 미국은 한국군의 군사 무기의 현대화와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또한 정부는 실업 문제를 해소하고 외화 획득을 위해 서독에 1963~1977까지 연인 7,900여명의 광부와 10,000여명의 간호사 인력을 수출하여 독일 정부로부터 3천만 달러의 차관으로 포항 제철이 세워지고, 국가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뚫려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61년도 1인당 GNP가 고작 78달러였던 것이 2024년도(한국은행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GNI(국민 총소득)가 36,624달러로 세계 6위이며, 일본이 세계 7위인 35,000달러인 것을 볼 때 일본을 앞질러 전체 경제 규모(GDP)로는 차이가 있으나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을 이룩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 발전한 것도 5.16 군사혁명 정부가 들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히 추진한 결과로 실질적인 경제 성장을 가져왔으며, 서독 정부에 상업차관을 얻어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국민복지정책도 세계 수준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순탄하지 않았고 피눈물 나는 각고의 노력의 결실이라 하겠다.
61.5.16 군사 혁명으로 이루어진 혁명정부는 혁명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오직 국민들에게 가난을 탈피하고 잘 살아보겠다는 신념으로 외국 차관을 적극 도입하기로 했다. 1961.11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인솔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사업 계획서를 설명하며 차관을 요청했으나, 1인당 GNP 고작 78달러에 불과한 우리나라가 최빈국으로 국제적 신인도가 없고, 지불 능력이 없고, 외국계 은행 지급 보증서를 받을 능력이 없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좌절하지 않고, 1950년대 연 8% 경제 성장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신흥 경제대국 서독 정부에 차관을 요청하기로 하고, 1961.11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상업 차관 교섭단을 구성하였다.
서독 정부 관료들을 만나려면 독일어 통역이 필요했으나, 당시 주 서독 한국 대사관에서도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백영훈 교수(독일 대학 경제학 박사)가 교섭단 통역과 특별 보좌관으로 발령받아 독일에 도착하였다. 이후 여러 고비를 겪으며 끝내 3천만 달러 차관을 확보하고, 광부와 간호사 파견을 통해 국가 경제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