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칼럼

새로운 애국지사가 필요한 때다

권해조
논설위원

-충절의 고장을 탐방하고

나라 안팎이 몹시 혼란스럽다. 오늘의 정세가 100년 전 구한말시대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런 난세에 마음도 울적하여 충남 예산에 살고 있는 친구의 안내로 1박 2일간의 충절의 고장 충청남도 북부 아산, 예산, 홍성, 서산지역을 탐방하였다.
아침 일찍 배낭을 메고 노량진역에서 전철을 타고 온양온천역에 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친구의 차를 타고 제일먼저 4km떨어진 아산현충사와 8km떨어진 이순신 장군 묘소를 찾았다. 아산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706년(숙종32년)에 세운 사당으로 1707년 숙종이 현충사(顯忠祠)란 현판을 내렸다. 1868년 (고종5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자 동아일보에 보도되면서 전국각지에 성금이 모여 1932년 다시 현충사를 세웠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때 1966년부터 1974년까지 현충사 성역화사업으로 새로 조성되었고, 충무공 탄신일인 4월28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했다. 현충사 입구 기념관에는 난중일기(국보76호), 장검(보물326호) 등이 보관 되어있었다. 충무문, 충의문을 지나 산록 밑에 자리 잡은 현충사를 참배하였다. 우측에는 충무공이 21세에 결혼하여 32세 무과 급제까지 구국의 역량을 키웠던 고택(古宅)과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활터가 있었고, 그 위에 셋째아들 이면(李葂)공 묘소가 있었다. 현충사를 보고 4km북쪽에 위치한 충무공 묘소(사적 112호)를 찾아 참배하였다.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공의 유해를 고금도(古今島)에 모셨다가 이듬해인1599년 2월 아산 음봉면 금성산(錦城山)으로 이장하였다가 1614년 현위치 어라산(於羅山)으로 다시 이장하였다.
다음은 충무공묘소 북쪽 월주산 뒤에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와 온양온천역 근처 맹씨행단, 장영실관, 외암마을 보고 예산으로 향했다. 장영실관은 본관이 아산인 장영실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과학기술이 공존하는 체험교육놀이 공간이었다. 맹씨행단(사적 109호)은 조선초 정승을 지낸 맹사성(1360-1438)의 옛 집으로 우리나리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며 경내에는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고택, 세덕사, 구과장이 있었다. 근처에 외암마을은 조선시대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민속촌이었다.
밤늦게 예산에 도착하여 친구가 정한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다음날 아침 일찍 제일먼저 찾은 곳은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사적 229호)이었다. 기념관에는 영정을 모신 사당 충의사, 생가 광현당, 성장가 저한당, 농촌부흥 운동을 하신 부흥원, 유물을 전시한 기념관이 있었다. 특히 1930년 3월 6일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면서 남긴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란 ‘장부출가생불한(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다음은 추사 김정희 고택과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추사고택은 증조부이며 영조대왕 부마이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1700년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선생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근처 세워진 추사기념관에는 추사의 다양한 면모와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2008년에 건립하였으며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 명화 불이선란(不二禪蘭), 추사가 사용했던 붓과 도장과 글씨 탁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변에 추사선생과 월성위 묘소가 있었다.
다음은 백제 위덕왕(554-597)때 지명법사(知命)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대한불교 조교종 선지종찰 수덕사를 보고 입구에서 오찬을 하고 홍성군에 들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 생가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문학체험관을 방문했다. 먼저 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김좌진 장군이 태어나 자랐던 생가를 들렸다. 99칸의 넓은 지대에 지금도 몇 채의 가옥이 있었다. 장군은 어릴 때부터 근처 와룡천에서 깃발을 들고 대장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1907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고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자주독립에 앞장섰다. 1929년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올랐으며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당원에게 암살당했다. 정부는 1991년부터 생가를 성역화하여 본채,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다음은 결성면 성곡리 만해기념관이다. 만해는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로 지조 있게 살다 간 대표적 인물이다. 1879년 출생하여 15세 때 결혼을 하고 19세에 가출하여 1904년 백담사에서 전영제(全泳濟) 스승에 수계 받고 190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 안거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여 서대문 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출옥하여 1925년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 했다.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동참하여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1992년 만해 생가를 복원하고 1995년 만해사(萬海祠)준공, 2007년 만해 문학체험관을 개관했다. 기념관 안에는 만해가 서양사상을 접하게 된 양계초의 문집인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과 조선망국을 월남망국에 비유한 월남망국사, 좌선 중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 오도송을 비롯하여 능산(隴山)의 앵무새, 추회(秋懷), 증병(贈別)등 만해 애국시 등이 있었고, 기념관 위쪽에 민족시비 공원과 생가(기념물 제75호)가 옛 모습의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만해문학관을 보고 시간이 부족하여 근처 당진에 있는 심훈 문학관과 김대건 신부 생가는 못보고 서산시에 있는 해미읍성만 보고 귀경하였다. 해미(海美)란 지명은 ‘바다가 아름답다’란 의미로 조선시대부터 사용한 지명이다. 해미는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적절한 장소로 판단하여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이설하기 위해 1417년(태종 17년)부터 1421년(세종 3년)까지 축성 완료하여, 육군의 최고지휘관인 충청병영이 위치하여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육군을 총지휘하였고 1651년 청주로 충청병영을 이전하였다. 그 후 충청도 5진영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고 영장(營將)으로 무장을 파견해 해미현감이 호서영장과 겸직하면서 읍성(邑城)의 역할을 하였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읍성의 하나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성곽을 자랑한다. 읍성 남쪽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500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관찰사 수령들이 정무를 보던 동헌(東軒),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객사(客舍), 병사들이 무예 닦고 휴식하는 청허정(淸虛停), 천주교 신자들의 투옥했던 옥사(獄舍)등이 있었다.
짧은 기간에 이번 탐방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현재와 같이 시국이 어수선할 때 새로운 애국지사들이 필요하다. 안내자에 의하면 조선후기 홍성군에만 238명의 충신들이 있었다하니 가는 곳 마다 선현들의 충혼(忠魂)이 풍겼다. 마지막 해미읍성을 보면서 성벽에 쌓인 크고 작은 돌들도 시간이 멈춰버린 듯 지나 온 역사를 머금고 있었고,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바쁜 일정에도 좋은 곳을 안내한 운파(雲坡) 윤태운(尹泰云) 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