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희랑대와 희랑조사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해인사를 올라가다 보면 삼선암으로 들어가는 길 위에서 오른쪽으로 백련암 가는 길이 나온다. 경사가 심한 길을 따라 중간쯤 올라가면 희랑대로 가는 갈림길에서 약 100m쯤 좌측으로 들어가면 이 암자가 자리 잡고 있는데, 금강산에 있는 보덕암처럼 20m가 넘는 절벽위에 7m가 넘는 기둥에 의지해 벼랑 끝에 세워진 암자의 모습은 마치 제비집을 보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희랑대는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희랑조사와 얽힌 사연도 담고 있어 그 기이한 풍경과 함께 신비감을 더 해주는 곳이다.
927년 희랑조사가 창건한 후 1940년에 현응스님이 중창하였는데, 1970년에 김성허 사주가 큰 방채를 번와 하였고, 1985년에 보광 강백이 입구에 요사체3칸 1동을 신축하였다. 희랑대는 그 암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희랑조사가 머물던 곳이다. 희랑대사(889~956)는 신라말기의 스님으로서 지금의 거창에서 태어나서 해인사로 출가한 분인데 화엄학의 대가로 커다란 명성을 떨쳤다.
최치원과 시문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던 그는 또한 고려 태조왕건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가 무너짐으로써 한민족이 다시 삼국으로 나뉘어 한창 어지럽던 무렵에 왕건은 백제의 왕손인 월광과 미숭산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월광의 전략에 빠져들어 완전히 고립된 채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던 왕건은 해인사의 희랑스님에게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구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화엄삼매에 들어가 화엄신장(불법을 보호하는 전신)들을 불러서 궁지에 빠진 왕건을 돕게 하였다.
왕건의 진영으로 쳐들어가던 월광의 군사들은 하늘에 가득하게 신병(神兵)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저 가운데 신령한 사람이 있음이 분명하니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리하여 겁에 질린 월광의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이 일로 왕건은 희랑대사의 높은 도력을 더욱 흠모하게 되어 스님께서 주석하던 해인사를 크게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있는 “조사도(1892년 제작)”를 보면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 이정스님과 함께 그려질 만큼 희랑조사는 불법을 크게 일으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희랑대는 희랑조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스님이 희랑대에 머물던 무렵 가야산 해인사에는 모기가 많기로 유명했다. 수도를 하는 스님들이 모기 때문에 정진을 못하자 희랑조사는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해인사의 모든 모기들은 희랑대로 모여들었고, 다른 스님들은 편안이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늘의 신장을 부를 정도로 희랑조사는 법력이 높았다는 얘기도 있다. 후삼국시대의 전란을 딛고 화엄종을 중흥시킨 희랑조사의 업적을 두고 스님과 교분을 나눈 고운최치원은 여섯 수의 시에서 스님을 문수보살에 비유하고 있다.
희랑대 뒤 큰 바위 곁에는 희랑조사가 심었다는 노송 한그루가 있었으나 10여년 전 말라 죽었다. 희랑대 뒤 삼성전에 모신 독성 나반존자는 그 영험이 불가사의해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나반존자는 말법시대에 나타나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며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다. 1940년 희랑대를 중창할 무렵 본래 계획은 암반 위에 2칸6평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목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두 칸은 너무 적으니 세 칸으로 지어 달라고 해 세 칸으로 지었다는 것, 꿈에 나타난 노인은 바로 독성 나반존자라는 얘기다. 해인사 들머리에 있는 성보박물관 이곳에 가면 다양한 불교 유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대장경 인경체험도 할 수 있다.
박물관 1층에 마련된 전시실을 찾으면 나무로 만든 희랑조사상을 만날 수 있다. 1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조각상은 희랑조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초상조각으로 초상기법이나 불상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유물이다.
희랑대에 얽힌 전설처럼 조사상을 보면 특이하게도 가슴 한가운데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다. 제자들의 수행을 위해 가슴에 구멍을 뚫어 피를 흘려 모기를 불러 모았다는 희랑조사의 전설을 조각상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또 희랑조사가 직접 조각상을 만들면서 자신이 전생에 흉혈국(胸穴國)사람임을 표시하기 위해 구멍을 뚫어다는 전설도 있다. 흉혈국 사람들은 가슴에 있는 구멍을 통해 불법의 기운을 내쏟았다는 것이다. 희랑조사상을 보면 살아 있는 스님을 뵙는 듯 생생하다.
형형하면서도 온화한 눈빛, 광대뼈, 튀어나온 볼, 오뚝한 코, 부드럽게 다문 입, 서로 포개진 앙상한 손 등 마음씨 넉넉한 노승의 풍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 철썩 같은 수도와 내공으로 다져진 의연함과 단호함도 느낄 수 있다. “차 한 잔 들고 가지”하며 길손을 맞을 것 같은 모습이다. 해인사 이름이 유래된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경지를 조각상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은은한 기품이 감도는 희랑조사상은 전통 조각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보물 999호로 지정돼 있다.
팔만대장경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해인사에서 가장 아끼는 조각 유산이다. 사람 앉은 키 높이인 82.7㎝의 이 조각상은 나무로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초상조각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도 매우 크다. 나무표면에 올이 고운 삼베를 붙이고 다시 그 위에 두껍게 채색을 했다. 비현실적으로도 느껴지는 불상 조각과 달리 인간이 넘치는 현실적 용모와 몸체를 그대로 살린 사실주의적 인물상이어서 더욱 정감이 간다.
세상에 어지러웠던 후삼국 시대와 고려 초기를 살았던 희랑조사 앙상한 몸매와 세모진 턱, 눈꼬리와 이마의 주름등에서 희랑조사가 겪었던 격동의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스님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산전수전 세파를 겪으며 지혜가 첩첩이 쌓인 때문인가! 스님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맴돌고 있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수행승의 인인자증하고 사려깊은 면모가 절로 느껴진다. 원만무애의 깨달음을 희랑조사상은 박물관을 찾은 이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