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적(主敵)을 친구로 삼다 – 이호석 수필가
나는 합천읍 소재지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을 뒤쪽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있다. 나의 집은 야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이 터에 집을 짓고 살아온 것이 벌써 40여 년이 되었다.
집터가 200여 평 되어 마당에는 잔디를 심고, 주택의 앞뒤에는 작은 텃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주택을 짓고 마당에 바로 잔디를 심었으나 몇 년 지나고부터 잡초가 하도 많이 나 제대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잡초에 항복한 후 그대로 버려둔 채 매년 전기 제초기로 서너 번 잔디와 잡초를 함께 깎고 있다.
앞 밭에는 매년 봄이면 각가지 채소 모종을 심고 뒷밭에는 제법 큰 유실수 몇 나무 아래, 앞 밭에 못 심은 채소 몇 가지를 더 심는다. 텃밭에는 초봄부터 찬 서리가 내리는 가을까지 온갖 잡초들이 수시로 솟아나 나를 괴롭힌다. 거의 매일 아침 틈을 내어 잡초를 매야 하니 여간 귀찮고 힘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주적이라고 하면 북한과 김정은 집단을 생각하지만, 농부들과 나에게 주적은 초봄부터 여름내 싸움을 해야하는 잡초가 아닌가 싶다. 내가 이곳에 집을 짓고부터 지금까지 매년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 이보다 더 한 악질 주적은 없을 것 같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뒷산에서 우는 뻐국새 울음소리와 집 울타리의 잡새들, 그 아래서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들은 나의 잠을 깨우는 알람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잡초들 에게는 날이 밝았다며 밭 주인이 나오기 전에 빨리 활동하라고 잠을 깨우는 2중 역할을 하는 듯하여 얄밉기도 하다.
나는 40여 년을 집 주위의 잡초와 싸움을 하고 있으니 주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매년 수차례 잡초와 싸움을 하지만 결국 승부를 내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한다. 그때가 되면 나와 잡초는 지칠 대로 지쳐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휴전에 들어간다.
이듬해 봄이 되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선전 포고도 없이 또 싸움이 시작된다. 잡초는 매년 대를 이어 새로운 놈들이 쳐들어오지만 나는 해가 바뀔수록 몸이 노쇠해지고 있으니 수년 내, 내가 완전히 항복해야 할 것 같다. 잡초들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호미로 뿌리를 쳐 못살게 하지만, 사나흘이 지나면 나를 약 올리듯 싱글벙글 웃으며 새로 나타난다. 조금도 겁내거나 움츠리는 기색이 없다. 이런 놈들을 어찌 내가 이기겠는가!
오늘은 5월 마지막 날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텃밭으로 나간다. 밭에는 이슬을 머금은 채소들이 기분 좋은지 활기가 넘친다. 토마토 포기에는 유리구슬만 한 토마토가 여기저기 달려있고, 가시오이에는 벌써 20센티 정도 크기의 오이 몇 개가 먹음직스럽다. 한쪽에는 제대로 큰 풋고추가 제법 탐스럽게 열려있어 채소밭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오이 하나를 뚝 따서 수돗물에 씻어 한입 베어 먹는다. 상큼한 오이 냄새가 입안을 즐겁게 하고, 올봄 농사를 잘 지은 것 같아 작은 보람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어제 아침 싸움에서 멈춘 휴전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오늘 아침에도 호미를 들고 잡초와 싸움을 시작한다. 잡초는 호미에 찢기고 뽑히면서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무지막지한 놈들이다. 6.25 전쟁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이랬지 싶다. 땅 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매일 끝없이 밀려 나온다. 내일이면 또 다른 놈들이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올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잡초와의 싸움을 잠시 중단하고 토마도, 가지, 오이, 고추의 곁가지 제거 작업을 한다. 채소 곁가지를 제거할 때면 흔히 이 가지를 제거할까, 저 가지를 제거할까, 망설이다가 제거 후 잘못 선택하여 후회할 때가 종종 있다.
곁가지를 제거하면서 채소의 꽃들을 눈여겨본다. 오이와 토마토는 모양은 다르지만 노란 꽃이다. 고추는 어릴 적 읍내 구멍가게에서 사 먹은 아주 작은 별 과자처럼 생긴 하얀 꽃이 옛 추억을 떠올린다. 가지는 작은 가시 주머니에서 보랏빛 꽃을 수줍은 듯이 내밀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갑작스레 잡초와의 전쟁을 영원히 끝낼 수 없을까 하는 궁리를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팔고 읍내로 나가 공동주택에 살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과 잡초와 싸움을 계속하더라도 마당이 있고 텃밭이 있는 지금의 단독주택에서 계속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이 대립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아침 식사 시간을 가졌다.
아침 식사 후 소파에 앉아 또 진지하게 혼자 토론을 재개한다. 이 집터는 부모님 때부터 살던 곳이고, 집은 내 힘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부모님과 내 삶의 흔적과 너무나 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이곳을 남에게 처분한다는 것은 불가한 것으로 결정하고, 차라리 주적에 대한 나의 사고를 바꾸기로 하였다.
미워하면서 끝없는 싸움을 치러봐야 나에게 스트레스만 더 쌓여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다. 승부가 나지 않을 싸움이라면 차라리 나의 여생을 잡초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잡초를 주적처럼 미웠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나를 일깨워 주고, 억지로라도 나를 움직이게 하여 건전한 생각과 건강 유지에 도움을 준 고마운 친구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텃밭의 잡초를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가족들이 다투어가며 살 듯이 이놈들과도 웃어 가며 싸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