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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에세이(6) <교언영색…>은 인간사회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통찰의 잠언 – 안병국 교수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은 유교 윤리의 핵심을 아주 간결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말과 표정을 꾸민 자에게 드물도다, 인(仁)은.” 하고 번역하는데, 좀 풀어 쓰면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얼굴빛을 예쁘게 꾸미는 사람 가운데에는 어진 이가 드물다”는 뜻이 되겠다.
이 구절은 인간관계 속에서 아첨과 기만이 어떻게 흥망을 좌우하는가를 생각케 하는 잠언(箴言)으로 읽혀져 왔다. 단순한 도덕적 훈계의 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된 인간과 권력의 모순된 법칙을 함의한 말과도 같은 것이다.
남송(南宋)의 재상 진회(秦檜)는 <교언영색>의 대표적 인물로 자주 언급된다. 그것의 반대급부는 쇠창살 속에 갇혀, 더구나 그 부인과 함께 천년하 세월 동안 벌을 받는 것이다.
진회는 악비(岳飛)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고, 남송의 국력을 쇠퇴하게 만들었다. 역사 속 평가도 냉혹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최고의 권력을 누렸지만, 후세에는 ‘충신을 죽인 간신’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는 등 매우 총명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송대의 과거 시험은 단순한 지식 시험이 아니라 정책 논술 능력, 유교 경전 해석 능력, 정치적 논리 구성 능력을 요구했다. 그는 서예에도 뛰어난 솜씨가 있어 <진체(秦體)>라는 자기만의 서체를 개발했다. 그 서체는 ‘송체(宋體)’와 유사하며, 오늘날 자주 쓰는 명조체(明朝體)로 발전한 서체라고 한다. 송나라에서는 서예 솜씨 하나만으로도 대접을 받았다. 서예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교양과 정치적 품격이자 문인 관료의 상징이었다.
그는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진회의 예술에 대한 안목은 황제와 권력층을 매혹시키는 문화 자본이 되었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고종〔高宗, 조구(趙構)〕가 그 소문을 놓칠리 없었다. 진회의 글과 글씨는 조정의 칙령, 그리고 외국으로 보내는 문서 작성에 전범(典範)으로 활용되었다.
진회는 고종이 어떤 문체를 좋아하며, 누구의 글을 좋아하는지까지 알아 문장을 지을 때는 그점을 참고했다. 황제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정확히 골라냈고, 그것을 가장 공손한 태도로 전달했다. 겉으로 보면 애정이자 충정같았지만, 그속에는 권력을 향한 깊은 계산이 숨어있었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 서기 위해 황제의 뜻에 맞는 말을 하는 능력을 부단히 길렀다.
그의 얼굴빛은 단순히 ‘꾸민 얼굴’로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보고 싶어 하는 표정의 연기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었다. 황제 고종이 드러내지 못하는 비겁함과 두려움을 대신해 주고, 그 앞에서 가장 충직하고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불안할 때 그는 평온함을 연기했고, 황제가 결단이 필요할 때 그는 독배를 마시는 자의 비장함을 연기했다.
본래 간신은 최고 권력자(군주, 황제나 왕)의 귀에 달콤한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그 권력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가장 논리적으로 하는 자이다. 오죽하면 한비자(韓非子)는 “군주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君無見其所欲〕”고까지 했을까. 군주가 자기 색깔을 드러내면 그것을 아는 신하들은 거기에만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진회는 황제 고종이 황제이면서도 황제의 권능을 다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고종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는 흠종(欽宗)이 돌아올 경우 자신의 황위(皇位)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해 왔다.
황제 고종은 어쩌다가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궁녀의 소생이었고, 휘종(徽宗)의 9남이었다. 위로는 황제로 즉위한 흠종 말고도 여러명의 이복형이 있었다, 맏형 흠종한테도 차기 황위 계승자인 11살짜리 황태자가 또 있었다. 때문에 정상적인 여건에서는 황위를 승계할 수 없었다.
정강 원년(1126) 금나라 군에 의해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이 함락되고 아버지인 휘종과 형인 흠종이 포로가 된 이른바 ‘정강의 변〔靖康之變〕’에 용케 도망쳐 살아난 것이 그가 얼떨결에 황제가 된 기회였다.
엄격한 적장자 상속제를 지키려는 유교국가 송나라에서 상황(上皇)인 아버지 휘종과 적장자인 흠종은 고종에게 너무나 큰 위협이었다. 형 흠종이 복귀하면 그에게 황위를 돌려줘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때문에 진회는 고종의 불안한 심리를 달래줄 최적의 ‘말’과 ‘표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진회는 바로 그 불안을 읽어냈다. 그것은 흠종의 귀국을 막자는 것이었다. 그것을 안 진회는 아버지 휘종과 흠종은 물론, 다른 황실 가족의 송환에 분위기를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고종에게 던진 말이 “잘못하면 폐하는 퇴위(退位)당할지 모른다”, 혹은 “폐하는 황위 참칭자로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 등의 위협하는 언사로 고종이 자신을 구세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 말은 황제의 두려움을 달래는 교묘한 정치적 언어였다.
다른 하나는 ‘화의론(和議論)’이었다.
“금나라와 싸우면 국력이 소모된다”, “백성을 살리려면 화의가 필요하다”, “황실의 안전이 우선이다”― 이런 논리적 명분은 겉으로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다.
흠종의 귀국을 막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이 되자 ‘화의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때 악비 등 주전파 등은 끝까지 금과 싸우자는 강경론을 주장했고, 그 강경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황제가 듣기 좋아할 말이 전쟁이 길어지면 황위(皇位)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그는 황제에게 하는 말로 가장하여 중신들에도 들리게 소리쳤다.

“진회가 황제를 알현할 때마다 오로지 화의(강화)를 주장했으며, 그 말은 대부분 황제의 뜻에 영합하는 것이었다〔檜每進對, 專主和議, 語多迎合上意.〕” / “전쟁이 오래 계속되어 백성의 힘이 이미 지쳤습니다. 차라리 화의를 논하여 천하를 안정시키는 것이 낫습니다〔(檜曰) 兵久不息, 民力已困, 不若議和, 以安天下.〕”― 『續資治通鑑』, 권 126.

그는 위의 인용처럼 ‘화의론’을 밀어붙이며 권력을 장악했다.
금나라와의 굴욕적인 강화를 추진하면서, 황제 고종 조구의 ‘안위’와 ‘평화’를 내세워 황제의 눈과 귀를 가렸다. 그의 말은 번지르르했고 논리는 정연했다.
고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진회의 <교언영색>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자기 중심이 없었던 암군(暗君)의 한계가 그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외물에 정신이 팔려 군주라는 막중 대사를 잊은 것이다.
본인은 정치에 힘을 쓰지 않았고 사실상 국가 통치는 재상인 진회가 오로지 하였다.
고종은 서화와 서예에 정신이 빠져버린 것이다. 진회를 총애해 악비를 처형하는 등 진회의 20여 년 공포정치를 방관했다.
말이 지나치게 화려할 때 그 말의 방향을 보아야 하고, 얼굴빛이 지나치게 공손할 때는 그 마음의 의도를 살펴야 하는 것을 잊은 것이다.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말과 얼굴빛을 꾸미는 사람 가운데에는 어진 이는 드물다.
이 가르침은 단순히 말투나 표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언행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성을 경계한 잠언인 것이다.
공자는 말에 대해 유난히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잘하는 것 자체를 미덕으로 보지 않았다. 말이 지나치게 번드르르할 때 그 속에 숨은 마음을 의심했다. 오히려 말〔言〕이 ‘유창하지 않고 서툴거나〔訥〕’, 모습〔色〕에 ‘꾸밈이 없고 투박〔木〕’한 사람이 어진 사람에 가깝다고 하였다.
겉으로 보면 이 말은 단순한 도덕적 경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만 들춰 보면 이 말이 단순한 훈계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통찰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역사는 거대한 거울과도 같다. 그 거울 앞에 서면 사람의 ‘말과 얼굴빛’은 결국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거짓된 말과 표정으로 한 시대를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긴 세월의 역사까지 속일 수는 없다. 그래서 공자의 짧은 한 문장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경계의 말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렇다.
주희(朱熹)의 관찰에 의하면 공자 몰후 천년하고도 또 반천년 동안이나 <교언영색>을 하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이 얼마나 없었으면 “성인 공자께서 말씀이 박절하지 않으시어 다만 ‘드물다〔鮮〕’고 하셨지, 실제로는 ‘아예 없다〔絶無〕’고 하신 것〔聖人辭不迫切 專言鮮則絶無〕”이라고 주(註)를 달았을까.
<교언영색>은 본 ‘학이’편 외에도 ‘양화(陽貨)’ 17, 그리고 ‘공야장(公冶長)’ 24에도 등장한다. 이는 공자 문하 제자들의 전송(傳誦) 과정의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강조를 위한 의도적 중출(重出)인지도 모른다.

〇 근년에 와서 진회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있기도 하다. 산이 언덕이 되고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는 세상이니 어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