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벽루에 올라 -옛 풍광과 내일을 바라보며 / 운산 임재근 전)합천부군수 시인·수필가· 성산미술대전 초대작가
함벽루(涵碧樓)에 오르는 길은 늘 그렇듯 언제나 고요하다.
강가에 물안개는 황강(黃江)이 품어온 새벽의 숨결이고
누각(樓閣) 옆 오랜 고목(古木)은 강바람을 품에 안은 채
마치 세월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굳건히 서 있다.
누각(樓閣)을 오르면 먼저 발아래 강물이 저절로 보인다.
유유히 흐르는 황강(남정강)은 천 년 전 대양성(大耶城)을 감싸든
그 자리 그대로 흘러 죽죽(竹竹)의 충혼(忠魂)을 위무(慰撫)하고 있다.
신라 백제가 다투고 고려 조선의 선비들이 오르내렸던 그 길을
이 강은 말없이 건너왔을 것이고
퇴계(李滉)와 남명(曺植) 우암(宋時烈)과 면암(崔益鉉)도
황강의 맑은 물결 위로 비치는 윤슬을 보며 마음을 닦고
대야성 너머로 일었다 사라지는 구름을 보며 도(道)를 생각하고
시를 읊었을 것이다.
우암(尤菴)이 새긴 함벽루(涵碧樓) 석각(石刻)은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이 아름다운 풍광을 지켜왔다.
이곳은 단지 옛 선비들의 발자취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합천의 산과 물은 늘 합천 사람의 살아온 길과 함께 있었다.
전쟁(戰爭)의 상흔(傷痕)이 남아있던 시절에도
논밭을 일구던 굵은 손마디 속에서도
황강은 묵묵히 흐르며 사람의 마음을 적셔 주었다.
오늘의 합천은 새로운 길을 찾는 시대 위에 서 있다.
도시화로 인한 농촌의 변화 앞에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자연의 가치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나는 때때로 이 누각에 올라 눈앞에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윤슬과 교감을 하기도 한다.
강(江)은 흔들거리는 듯하지만 흐르는 길을 잃지 않고
산(山)은 세월에 깎이는 듯해도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들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 선비의 지조(志操)와 배움의 정신(精神)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세상과 능동적으로 함께하는 진취적인 마음 자세,
자기를 지키되 머물러 있지 않고, 앞을 바라보되 뿌리를 잃지 않는 길을…
황강의 바람이 누각을 스쳐 운다.
나는 잠시 난간에 손을 얹고 눈을 감는다.
지나온 세월과 앞으로의 날들이 조용히
강물 위로 포개어지는 듯하다.
함벽루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합천의 사람들은
이제 새날을 향해 발 빠르게 나아가야 한다.
강물처럼 맑고 산빛처럼 흔들리지 않게
그리하여 합천의 내일도 이 강처럼
유유히 흐르며 연년세세 빛나기를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