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 잡는 남자
이호석
논설위원
높고 푸른 하늘이 상쾌함을 더하는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이었다. 아침을 먹고 이슬이 깰 무렵 다랑논이 다닥다닥 정겹게 붙어있는 인근 골짜기로 집사람과 함께 메뚜기를 잡으러 갔다. 초등학창 시절 아련한 추억밖에 없는 메뚜기 사냥이라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10월의 끝자락이라 지난해 같으면 가을 추수가 거의 끝났을 텐데 올가을은 잦은 비로 추수가 늦어져 아직도 군데군데 진논에는 벼들이 누렇게 익다 못해 옅은 갈색으로 변하며 고스러지고 있고, 벼를 일찍 벤 논에는 어느새 벼 포기마다 푸른 새싹들이 한 뼘씩이나 자라 마치 모내기를 해 놓은 것 같다. 띄엄띄엄 보이는 푸른 무, 배추밭과 갖가지 색깔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주변의 단풍이 잘 어우러진 골짜기 풍경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이렇게 한가하게 집사람과 메뚜기를 잡으러 나온 것은 난 생전 처음이다. 지난해까지 직장을 다니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직장에 다닐 적에는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도로변 산기슭에서 부인과 함께 알밤을 줍거나 메뚜기를 잡는 남정네들을 보면 저렇게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인가 싶어 한심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우리나라가 IMF를 당하여 실직자가 급증할 때는 이런 광경을 더 자주 보았다. 그때는 정말 국가 경제가 걱정되었고 젊은 실직자들을 보며 안쓰럽기도 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언제 퇴직을 해도 뭔가 내가 할 일이 항상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퇴직 후에도 저렇게 한가하게 메뚜기나 잡는 한심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초등학생 시절, 벼들이 누렇게 익은 가을이 되면 마을 소꿉친구들과 곧잘 어울려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다. 그때는 지금같이 흔한 페트병도 귀할 때라 메뚜기를 잡으면 벼 이삭 줄기에 메뚜기를 끼워서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또 그때는 지금같이 모든 농사에 기계화가 되지 않은 때라 낫으로 벼를 베 며칠씩 논바닥에 줄을 지어 늘어놓고 벼가 마르면 작은 단으로 묶어 집 마당이나 인근 논바닥에 임시로 만든 마당으로 지게로 져다 모아 탈곡을 했다. 그렇게 벼를 베서 가지런히 늘어 말리는 논에 들어가 메뚜기를 잡는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벼들이 흐트러져 주인한테 혼이 나기도 했다. 조금 성장 후에도 농촌에 살았지만, 가을철이면 벼 베기와 보리 갈이 등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소도 먹여야 했기 때문에 메뚜기를 잡고 다닐 한가한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직장을 다니는 동안은 아예 메뚜기란 이름조차도 잊고 살았다.
지금은 직장 은퇴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남는 것은 시간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메뚜기 잡으러 가자는 집사람의 청을 뿌리칠 뚜렷한 명분도 없을뿐더러 굳이 집사람의 비위를 거스를 입장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은 명색이 남자라고 내 고집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여존남비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편할 것 같다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 이렇게 메뚜기를 잡으러 나왔지만, 오랜 직장생활이 몸에 배어 그런지 아직도 뭔가 일에 쫓기는 그런 마음이라 한가하고 편안하기보다 어색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들녘으로 나오니 산과 들이 온통 단풍으로 물들며 새로운 자연을 펼치고 있고, 푸른 가을 하늘과 조금은 차가운듯한 시원한 공기가 너무 좋았다. 생전 처음으로 집사람과 함께 메뚜기를 잡으러 나와 보는 들녘은 지금까지 바쁜 일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풍경과 여유로움이 있었다. 벼를 벤 논두렁과 볏짚이 늘여 있는 논바닥을 돌아다니며, 폴짝폴짝 뛰는 메뚜기를 잡아 페트병에 차곡차곡 넣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그런데 메뚜기를 잡으면서도 잠시 잡다한 생각을 했다. 메뚜기 몸집의 크기도 다 다르고, 벌써 알을 밴 듯한 불그스름한 빛깔을 하며 뒤뚱거리는 놈이 있는가 하면, 지금도 한창 암수 두 놈이 한 몸이 되어 사랑을 나누는 놈들도 있었다. 붙어 있는 두 놈을 한꺼번에 잡으니 양이 빨리 늘어 좋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인정머리 없는 짓 같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은 죽어도 영혼이 남는다고 하는데, 이 작은 미물에도 영혼이 있다면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하며 측은해 하니까, 옆에 있는 집사람이 이제 곧 추위가 닥치면 모두 죽을 것이고, 사람도 죽을 때 신장을 기증하는 사람도 있는데, 늦가을 메뚜기로서는 오히려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죽음인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메뚜기들이 알아들으면 정말 억장이 무너져 펄쩍 뛸 노릇이다. 나는 약육강식이 자연의 섭리이지만 인간들이 너무나 이기적인 사고를 가진 동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집사람과 함께 메뚜기 잡는 모습을, 한창 일하기에 바쁜 젊은이들이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예전에 나 같이 하릴없는 너무나 한심한 사람으로 보지는 않을까! 생산 일선에서 열심히 일하고 명예롭게 은퇴한 후, 제2의 인생을 자연 속에 묻혀 여유롭게 보내는 행복한 사람으로 봐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모처럼 단풍으로 채색된 풍요로운 가을 들녘에서 자연을 벗 삼아 마음 편히 보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