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의 유적지(생가지)를 복원하여야 한다 (1)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합천문화원(원장:전정석)에서는 11월24일 문화원이사와 향토사연구소 위원 40여명이 무학대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대병면을 찾았다.
금년 향토사연구소에서는 무학대사의 학술발표회를 갖기 위하여 지난 10월13~14일(1박2일간)에 걸쳐 무학대사의 유적지로 알려진 충남서산 간월도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를 다녀왔다.
오전9시30분 문화원을 출발하여 대병면 합천댐 아래 구리듬 무학대사의 생가지로 알려진 곳을 먼저 찾았다.
이날 안내는 합천문화원 부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권동술 부원장이 상세한 내용의 설명을 시작했다.
권동술 부원장은 대병면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웃어른들로부터 들어온 이야기와 보고 느낀 대로의 내용을 한 점 빠짐없이 현지 확인과 아울러 설명을 곁들였다.
먼저 무학대사에 대하여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부터 알아 볼 것 같으면
무학대사는 조선초기의 고승으로서 속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 호는 무학, 당호는 계월헌, 시호는 묘엄존자이다.
1327년(고려 충숙왕14)윤 9월22일에 당시 경상남도 삼기현(현 합천군 대병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인일이며, 어머니는 고성채씨이다. 어머니가 어느 날 밤 아침 해가 품안으로 비치는 꿈을 꾸고 자초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자초는 18세에 출가하여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혜명국사에게 불법을 배운 후 일찍이 원나라에 들어가 고승 지공을 참례하고 돌아와 전국의 유명 산사를 순례하며 수도 하였다. 고려말 공양왕으로부터 국사로 왕명을 받았으나 이를 끝까지 고사하였다. 그 뒤 조선태조 이성계를 만나 조선왕조 개국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신도읍지 정도(定都)에 큰 역할을 하였다. 자초는 1392년 태종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사가 되었으며 조선초기 숭유억불책 속에서도 불교의 보호와 계승에 최선을 다하여 오늘날 우라나라 불교의 명맥을 승계한 조선 최대의 고승이다.
자초는 왕사에 임명된 후 주로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거주하면서 조선초기 정국(政局)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 하였고, 1405년(태종5)9월11일 금강산 금장암에서 세수79세, 법랍61세를 일기(一期)로 입적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 충남 서산에서 무학의 출생지가 서산 간월도 라고 내세우면서 그의 가계를 밝히고 있는데 1989년12월 당시 서산 군수 박융하가 인지면 애정리에 무학대사기념비라는 표지석을 세웠는데 여기에 기재된 내용은 그 지역 일부에서 구전되어 오는 내용과 1981년에 간행된 이종익의 전기소설 ‘무학대사’를 근거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학의 부모가 왜적에게 피납되어 대마도로 끌려가다가 적을 죽이고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인해 표류하다가 서산 간월도에 정착하여 무학을 낳았다. 그러나 선상에서 왜적과의 격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아버지는 사망하였는데, 무학은 3세에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삼기현으로 돌아와 사서오경 등을 통달하였다.
18세에 과거를 보기위해 가던 중 지리산 청학도인을 만나 화개동 불일암에서 3년간 천문, 지리, 풍수, 도참 등의 학문을 터득하여 21세에 조계산 송광사를 찾아 혜감국사의 수제자였던 소지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경기도 용문산으로 혜감국사를 찾아 불법을 배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서산사람들의 주장일 뿐. 어디까지나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양주 회암사에 있는 무학왕사묘엄존자비문이 가장 정확하다고 하겠다. 비문 내용을 보면 “자초는 어머니 고성채씨가 아침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1327년(충숙왕14) 9월22일에 삼기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호는 계월헌, 시호는 묘엄존자, 탑호는 자지홍융이다.”하므로 자초의 고향은 삼기현에서 태어났으므로 합천이 틀림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