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합천 지역 3·1만세운동 후 교육과 청년회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1919년 기미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삼가·대양·대병·초계 3·1만세운동 후 그 정신과 열정으로, 사립 구음의숙(龜陰義塾)과 삼일의숙(三一義塾)·정양의숙(正養義塾)을 설립하고, 합천군내 최초의 중등학교인 공립 삼가농업보습학교(三嘉農業補習學校)를 주민들의 힘으로 설립했다.
일제(日帝)가 설립한 공립보통학교와는 별개로, 1920년 4월 가회면 함방리에 사립(私立) 구음의숙(龜陰義塾)을 지역 유력 인사 윤재현(尹在鉉, 1887~1934)과 윤병규 한필동(33세, 삼가 3·1운동으로 대통령표창) 등 수십 명의 발기(發起)와 2,100여 원으로 설립했다. 그뒤 학생이 150여 명으로 늘어나 갑·을·병 3반으로 나누고, 중등과(中等科)도 개설하여 조선어·체조·영어·불어·수학·수신·창가를 가르쳤는데, 1925년 폐교된다.
삼가 및 대병 3·1만세운동 후, 1921년 4월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에도 사립 삼일의숙(三一義塾)을 지역 유지 송필영(宋弼永, 1892∼1946)과 송헌식 등이 은진송씨 재실인 삼희재(三希齋)에 설립했다. 이때 송보영 송주용 이재산 등도 참여했다. 대병면 하금리·유전리·대지리 3개 지역에서 3,000원을 모아 설립했는데, 개교 때 학생수는 90여 명이었다. 1925년 5월부터는 중등과(中等科)를 신설했으나, 1927년 폐교된다. 기부금 등으로 세운 교육기관인 의숙(義塾)이 폐교된 주된 원인은, 일제의 탄압도 있었지만, 그즈음 공립보통학교 설립이 확대되고 있었고, 특히 지원자가 격감했기 때문이다.
합천의 동부 지역인 초계에서는, 대평리 노호용(盧浩容, 1898∼1976)의 주도로 변승규 오대현 남상수 등이 1921년 5월 초계면에 학생 90여 명으로 설립한 중등(中等) 사립인 정양의숙(正養義塾)도 1927년 아쉽게 폐교됐다. 폐교 무렵에 학생수가 180여 명이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삼가 가회 상백 백산 대병 등 옛 삼가군 지역 주민들이 뭉쳐 2년제 공립중등교육기관인 삼가농업보습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1927년 3월 9일 삼가 상백 백산 가회 대병 5개면 면민이 가히 광적으로 2년제 중등학교인 ‘농업보습교기성회(農業補習校期成會)’를 조직한다. 3월 20일 삼가면소 내에서 대병 상백 가회 백산 삼가 5개면 2,000여 명이 모여 ‘삼가농업보습학교 설립 5개 면민 결의대회’를 개최하여 “부담금은 삼가 7,000원, 대병 1,500원, 가회 1,500원, 상백 1,500원, 백산 500원, 창립위원은 대병 송헌식, 상백 정의규(鄭義圭), 백산 김병규(金炳圭, 백역 거주), 가회 윤병규, 삼가 조순규(趙純圭, 면장)”로 했다. 5월에 5개 면민이 필사적으로 분투하여 학교설립비 9,000원과 기지(基地: 학교부지) 3,500평을 완비한다.
1927년 5월 당시 합천군내 초등학교인 공립보통학교는 합천 야로 봉산 대양 용주 초계 청덕 덕곡 삼가 대병 가회 등 11개소, 학생수는 1,788명(남 1,455명, 여 333명), 교원은 38명이었고, 일본인 공립소학교 1개소(남 9명, 여 11명, 교원 2명)가 있었다. 야학교(夜學校)는 합천노동야학교, 합천여자야학교, 서산야학교, 초계노동야학교, 삼가여자야학교 등 10개소, 학생은 500여 명이었고, 서당(書堂)수는 99개소, 아동수 756명이었다. 그때까지 공립중등학교는 설립되지 않았다.
1928년 4월 하순 합천면 유지 박창우 등이 “삼가면이 아닌 합천면에 보습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진정서를 경남도에 제출했다. (그러나 관철되지 않음). 이에 곧바로 1928년 5월 초에 삼가 등 남부 5개면 주민들은 합천 전군학교 조합평의원(陜川 全郡學校 組合評議員)을 소집하여 삼가농업보습학교설립 예산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조속한 인가를 촉구”하는 면민대회를 개최했다. 1개월 후 6월 18일 경남도에서 설립 인가가 나고, 1928년 7월에 수업 연한: 2개년, 학과: 수신(修身), 국어(주: 일본어), 조선어, 수학, 역사, 지리, 이과, 농업, 체조, 수업료: 월액 50전, 1개 학급 학생 20명을 모집했다. 드디어 1928년 9월 합천군민의 숙원인 공립 삼가농업보습학교가 현재 삼가면 소오리 삼가초등학교 자리에 모금 1,5000원과 20,000여 평 부지에 개교하게 된다. 1931년 11월 12일 오후 6시경 램프에 석유를 넣다가 불이나 교사(校舍) 1동이 전소(피해액 12,000여 원)되기도 한다. 1936년 2월에는 “학년 연장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삼가면장 강신부, 이정근, 조전방평(朝田芳平), 조기순(曺基淳), 강석황 등이 기금 2,000원을 모금하여 합천군 당국에 진정했다.
2년이 지나 삼가농업보습학교가 합천면으로 이전하려는 경남도의 방침이 발표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38년 3월, 삼가농업보습학교 합천면 이전 반대를 진정하기에 이른다. 조기순, 고목이삼 등 4명이 부산 부민동 경남도청을 방문하여 “면민(5개면)이 부담하여 설립한 학교를 합천면으로 이전하는 것은 절대 반대하며, 현재 2년제를 1년제로 단축하는 것도 반대한다”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1938년 3월 19일 삼가농업보습학교 마지막 졸업식을 한 후 합천면으로 이전돼 합천농업실수학교(陜川農業實修學校, 현 합천중·고등학교)로 4월에 개교하게 된다. 7년 후 해방이 되자, 삼가 쌍백(상백+백산) 가회 대병 주민들은 1946년 ‘삼가중학교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6·25전쟁 중인 1952년 5월 공립 삼가중학교(6학급)를 개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