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양루(岐陽樓)의 루명(樓名)과 용도에 관한 소고 (1)
최상호
삼가향교 유도회장
기양루(岐陽樓)는 합천군 내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樓閣)이다.
요즈음 그 루명(樓名)에 대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이 나오고 있어서 바로 잡고자 한다.
먼저 각 전적(典籍)이나 최근(最近)에 발표(發表)된 글부터 살펴보면 첫째, 민족문화(民族文化) 대(大) 백과(百科) 사전(事典)에는 그 용도(用度)에 대(對)하여 전(傳)해지는 말이라고 하며, 고을 원(員)님들의 연회(宴會) 장소(場所)로 쓰였던 건물(建物)로서 일명(一名) 도계문루라고도 불렸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러나 기양루(岐陽樓)가 실제(實際) 사용(使用)되던 시기(時期)에 직접(直接) 눈으로 보고, 체험(體驗)한 삼가(三嘉) 금리(錦里)에 거주(居住)하는 황옹(黃翁)을 한판수(韓判守) 합천(陜川) 경우회(警友會) 회장(會長)과 함께 찾아 가서 소시적(少時的) 삼가(三嘉) 문물(文物)에 대(對)한 여러 가지 사실(史實)을 녹취(錄取)하였다.
그때 황옹(黃翁)은 89세(歲)로서, 한일(韓日) 합방(合邦) 후(後) 삼가군(三嘉郡)이 없어 질 때 열두 살이었다고 했다.
황옹(黃翁)에 따르면 기양루(岐陽樓)에는 시각(時刻)을 알리는 큰 북이 달려 있었는데 아침에 치면 성문(城門)을 열고, 저녁에 치면 성문(城門)을 닫는 문루(門樓)이며, 삼가군(三嘉郡)의 관아(官衙)를 드나드는 출입문(出入門)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기양루(岐陽樓)바로 앞은 남문(南門)에서 서문(西門)으로 가는 대로(大路)이며 백성(百姓)들이 끊임없이 다니는 큰길이라고 했다. 아무리 조선(朝鮮) 시대(時代)라고 하지만 행인(行人)의 면전(面前)에서 주연(酒宴)을 베푸는 것은 이해(理解)하기 어렵고 특히 커다란 북이 걸려 있는 이 문루(門樓)는 연회(宴會) 장소(場所)로는 적합(適合)하지 않으므로 잘 못 전(傳)해진 말을 기록(記錄)했다고 보여 진다.
둘째, 합천군(陜川郡) 사(史)에도 옛날 고을 수령(守令)들의 연회(宴會) 장소(場所)라고 전(傳)해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기양루(岐陽樓)에는 황소 한 마리와 큰 암소 한 마리를 잡아 그 가죽을 통째로 양쪽에 하나씩 붙인 아주 큰 북을 만들어 문루(門樓) 2층(層)에 거치(据置)하고, 삼가현(三嘉縣) 현내면(縣內面)의 모든 백성(百姓)이 들을 수 있도록 북을 울려 성문(城門) 출입(出入)을 통제(統制)하고 시각(時刻)을 알리는 기능(機能)을 하는 격고장(擊鼓場)이고, 관아(官衙) 출입문(出入門)이며, 누각(樓閣) 바로 앞은 백성(百姓)들이 왕래(往來)하는 길이므로 이곳을 연회장(宴會場)으로 사용(使用)하였다는 것은 이치(理致)에 맞지 않아 기양루(岐陽樓)의 용도(用途)로서 옳은 설명(說明)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관아(官衙)가 없어진 후 이 건물(建物) 이름이 폐물래청(廢門樓廳)이라고 불리어진 것을 보면 문루(門樓)임이 확실(確實)하다.
크고 높은 2층(層) 문루(門樓)는 그 고을의 위세(威勢)용(用)으로 큰 고을에는 있는 례(例)가 많다.
셋째, 합천신문(陜川新聞) (2015.11.12) 기사(記事)에 실린 진주(晉州) 명신(明新) 고등학교(高等學校) 교장선생(校長先生)님의 글에도 연회(宴會) 장소(場所)로 쓰였다고 하였으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 삼기현(三岐縣)이 강양군(江陽郡)으로 변경(變更)되어 삼기현(三岐縣)의 기자(岐字)와 강양군(江陽郡)의 양자(陽字)를 따서 기양루(岐陽樓)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연회(宴會) 장소(場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밝혔고, “삼기현(三岐縣)에서 강양군(江陽郡)으로 변경(變更)되었다” 라고 한 것은 변경(變更)된 것이 아니고, 강양군(江陽郡)의 속현(屬縣)이 된 것이며, 이마저 공민왕(恭愍王) 22年에 속현(屬縣)에서 독립(獨立)시켰기 때문에 조선시대(朝鮮時代)에 건축(建築)한 기양루(岐陽樓)를 여기에 관련(關聯)지우는 것은 사리(事理)에 맞지 않다.
그리고 고려시대(高麗時代) 삼가(三嘉)의 고명(古名)이 기양(岐陽)이라서 기양루(岐陽樓)라고 했을 가능성(可能性)에 대(對)하여는 삼가(三嘉)가 기양(岐陽)이라고 기록(記錄)된 바는 사서(史書)에서는 찾을 수 없고 일부(一部) 기록(記錄)[삼가향교 중수 기문 인천 이씨 족보, 三嘉鄕校 重修 記文 仁川 李氏 族譜]에서 볼 수 있으나 문루(門樓)를 축조(築造)하면서 지명(地名)을 당호(堂號)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주(晉州)에 진주루(晉州樓)가 없고 동래(東萊)에 동래루(東萊樓)가 없듯이 그러한 사례(事例)가 없다. 우리의 선조(先祖)들은 문중(門中)의 재실(齋室)을 지어도 출입(出入)하는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후손(後孫)들은 교훈(敎訓)을 얻을수 있도록 함의(含意)가 있는 당호(堂號)를 지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