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

(사)합천향토사연구회 정유년 신년 창의사 참배 (1) /이성동

이성동
논설위원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야기된 민심의 분노가 박근혜 대통령의 2월 중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와 이에 반대하는 친박(친박근혜) 보수단체들의 맞불집회가 각각 대규모로 주말마다 열리고 있다. 대통령 탄핵 정국에다 정치권 또한 대선 민심을 얻기 위한 노력에만 치중하여 국정운영의 난맥상과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민족정기를 새롭게 정립하고 국가와 민족이 나아갈 새로운 정신적 지표를 모색하기 위해 (사)합천향토사연구회가 지난 2월 4일, 정유년 새 해 들어 처음으로 대병면 창의사를 찾았다. 본회는 2005년에 발족하고 2007년 경상남도에서는 최초로 사단법인 전국향토사협의회에 회원단체로 입회하여 전국단위 학술세미나에 매년 1회 참가하고 있고, 발족 이후 매년 3~4회에 걸쳐 군내외의 역사 유적 및 역사 인물을 탐구하고 그 실적을 기록 유지하며 명실상부한 향토사연구단체로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본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 조직은 회장에 이성동(야로), 부회장에 이병생(가야), 사무장에 김무만(합천읍), 감사에 하수갑(야로), 일반회원들은 가야면에 이근필, 김창원, 강덕문, 이석희, 박수남, 김상원, 허석기, 이학균 야로면에 이찬균, 신용석, 합천읍에 최영희(문화원), 용주면에 윤한무, 신추옥, 삼가면에 조찬용 등 1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회가 이날 찾아간 창의사는 임란 때 국가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연전연패하는 관군을 대신해서 국토와 민족수호를 위해 창의(倡義)하여 목숨을 걸고 국난을 극복했던 자랑스러운 호국 영령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일행이 이곳에서 먼저 사당으로 올라가 호국영령들에게 참배를 올린 다음, 사무실에 내려와서 곽효빈 사무국장으로부터 창의사의 창건동기와 110위 봉안배위(奉安配位)를 비롯한 합천의병들의 의병활약상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이 자리에서 곽 사무국장은 창의사 창건동기를 “1992년 3월 8일 합천문화원에서 뜻있는 지역유지와 향토사학자 등이 발기하여 임란발발 400주년을 맞아 그때 살신성인(殺身成仁)하신 창의장(倡義將)과 창의의사(倡義義士)님들의 드높은 공적을 추모선양(追慕宣揚)하고 충혼의백(忠魂義魄)을 봉안할 사우(祠宇)을 창건하여 향사(享祀)를 하면서 자손만대 호국충절의 성지(聖地)요, 산 역사의 교육도장으로 삼고자 창의사(倡義祠)를 창건했다”고 말했다. 강의 말미 질의응답 시간에는 창의사 창건 당시 경제적 어려움 등 개별 사정으로 배향되지 못한 의사님들에 대한 추가 배향 사업이 현재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으나 임란 때 함께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의사님들에 대한 추가 배향의 길이 열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은 만주의 대륙에서 내려와 정착하면서 흰옷을 즐겨 입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 흰 베옷을 입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남해 바다건너 섬에 사는 왜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다.
일본은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한반도 남부와 서해안 지역을 침투해 우리 백의민족을 자주 괴롭혔다.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왜구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고도 그들에게 다시는 침략하지 말라고 먹을 양식을 주고 달래며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귀담아 듣고, 이에 충분히 대응했더라면 임진왜란은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왜국(倭國)은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끝나고 풍신수길(豐臣秀吉)은 막부세력들의 상호견제와 패권경쟁으로 그 당시 그의 입지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풍신수길(豐臣秀吉 : 도요토미 히데요시)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막부세력들의 관심을 국외로 전환하기 위해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한다는 구실로 군비확충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왜국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사신 일행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부산에 도착했을 때 황윤길은 즉시 장계를 올려 풍신수길의 동정을 보고하고, “반드시 병화(兵火)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한양에 도착해 선조가 일본의 정황을 물었을 때 황윤길은 장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말했으나 부사 김성일의 답변은 딴판이었다.
“왜국에서 병화를 일으킬 만한 징조를 보지 못 했습니다”라는 것이 임금의 물음에 대한 김성일의 답변이었다. 정사와 부사의 말이 서로 완전히 어긋난 것이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전란 직전에 적정(敵情)을 탐지해 와서 전쟁에 대비해야 할 조정의 국론이 엇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조 때 조선은 동인(東人)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고, 오늘날처럼 국론통일이 안 되었던 때였다. 선조는 이때 부사 김성일의 보고를 듣고 당시 상황을 오판하여 일본의 침략이 없을 것으로 단정하고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으로 제작 중에 있던 이순신의 거북선도 국비낭비라고 극력 반대하였다.

임진왜란의 발발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대마도를 출항한 700여척의 대선단이 소서행장 휘하의 조선침략 선봉인 1군(18,700명)을 싣고 부산으로 항진하여 일몰경 부산포 앞 바다에 그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막이 올랐다. 이들은 백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해 전술이 단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관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으로 새를 맞추어 떨어트린다는 조총(鳥銃)이란 신무기로 무장하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 왜군의 군사조직은 선봉을 1, 2, 3군으로 편성하고 본영의 명호옥(名護屋) 후방지원 병력까지 305,3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이들 중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최선봉군 1만 8,000명이 먼저 부산외항에 입항해 해가 저물자 해상에서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왜적들은 14일 아침부터 부산포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 첨사 정발(鄭撥)은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선봉군은 세 길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일만인 5월 2일 한양(漢陽)을 점령하고, 후속 군단들도 북상을 거듭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침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