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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26) – 하재효

해인사 고운 최치원선생 유적(2)

3.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당나라 유학 시절
(1) A.D 868년(12세, 신라 경문왕 8년, 唐 懿宗 咸通 9년) : 서해(西海)를 건너 당나라에 들어가 서울인 장안(長安)에서 배움의 길을 찾아 6년을 공부했다. 국자(國子)로 뽑혀 관비(官費)로 당나라 서경(섬서성 서안시 장안성, 당시 당의 수도)으로 건너가 국자감(國子監)에 유학하였다.
(2) A.D 874년 9월(18세, 唐나라 僖宗 乾符 元年) : 당나라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실시한 빈공과(賓貢科, 외국인들이 보는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진사(進仕)가 되다.
(3) A,D 875년(19세, 헌강왕 1년) : 주나라의 도읍지였던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유람하며 학문 연구와 많은 시부(詩賦)를 짓다.
(4) A.D 876년(20세, 乾符 3년) :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강남도(江南道, 강소성) 선주(宣州) 관할의 율수현위(溧水縣尉)가 되어 관직에 들다. 시어사 내공봉(侍御史 內供奉)에 임명되고 어대(御袋)를 하사받다. 이때 공사간에 지은 글을 모아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을 만들다.
(5) A.D 877년 겨울(21세) : 고급 관리가 되기 위한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1년 만에 율수현위를 사직하다.

[선생의 당나라 유학시절에 대한 필자의 小考]
위 (1~2항)에서 어린 최치원이 유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당, 신라, 부모님, 그리고 최치원이 엮어낸 일련의 힘든 과정들에 대하여 자료를 찾던 중 <서진모 著, 고운 최치원 선생 그리고 그 후손들, 호산당>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拔萃)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당시 대제국이었던 당나라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흥성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으나 여전히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이었다. 당나라는 개방정책의 하나로 주변 여러 나라의 학생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에게도 등용의 문을 열어 “빈공과”라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는 당나라가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그 사람을 인정하고 대우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분의 제약 때문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골품제의 한계 때문에 고국에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선택하곤 했다.
유학을 떠나는 소년 치원의 각오도 대단하였다. 당나라에 간 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끈으로 묶어 천정의 대들보에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人百己千)”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그가 지었던 시에서 그의 힘들고 외로운 심경이 묻어난다.
사방으로 갈림길의 먼지 속을 떠돌면서 / 홀로 파리한 말을 몰고 얼마나 고생했나 / 돌아가는 것이 좋은 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 다만 돌아가 보았자 또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계속)

*본보 1064호(2017.2.9일자) 5면의 본란(연재25호)에서 B.C는 A.D로 바로 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