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합천향토사연구회 제2차 역사인물 및 유적답사 (1)-이성동
이성동
논설위원
역사는 그 시대의 승자(勝者)들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기록되어 질수 있기 때문에 삼국과 함께 병존했던 가야사는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소외되어 단편적으로 기록되었다. 삼국시대로부터 배제된 가야사는 오래도록 한국사의 주류로 자리 잡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맴돌다가 일제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에 덧씌워짐으로써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가야사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1977년 고령의 지산동 44호, 45분 고분과 1986년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 등이 발굴되면서 한 사람의 주장자(主葬者)를 위하여 수십 명이 강제로 죽음을 당하여 매장된 순장자(殉葬者의 시신, 그리고 주장자(主葬者) 주변에 놓인 금관 또는 금동관, 환두대도(換頭大刀) 등 왕릉급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나타남으로써 땅 속에 묻혀 있던 가야사(대가야사, 다라국사, 아라가야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야 제국의 중심은 줄곧 김해의 금관가야였다는 인식이 팽배하여 타 가야사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의식의 배경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이 금관가야의 후예라는 점과 임나일본부설의 주된 대상지가 김해였다는 사실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금관가야는 여러 가야 세력이 성장하던 초기에 잠깐 동안 유력하였을 따름이며, 실제로는 가야 가운데 AD400년 이후 장기간 정치적` 문화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나 함안의 아라가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점은 거대한 외형을 가진 고총 고분의 규모나 분포 수 및 여타 문헌 자료를 통하여 명백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집안에 앉아만 있으면 외부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야 우리의 것이 잘 보일 수 있다. 외부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사) 합천향토사연구회가 대가야와 다라국 외의 타 가야국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기 위해 지난 4월 23일 아라가야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함안의 박물관과 우리고장 합천이 배출한 신재 주세붕 선생의 본가인 무산사, 그리고 고려 충신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 선생의 은둔처인 제2의 두문동 마을로 불리는 고려마을 등 함안 지역 역사인물 및 유적을 답사하였다.
청명한 4월의 화창한 봄날과 조화를 이루는 제 30회 아라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이날 오전 10시 반경 불꽃무늬 토기(火焰形透窓土器)를 형상화한 대형 토기 건축물이 서있는 박물관 입구에서 미리 대기해 있던 함안지역 역사 문화 관광해설사 강재오 선생을 만나 영접을 받고 곧 바로 접견실에 들어가 유리창 밖으로 전개되는 아라가야의 왕릉, 말이산 고분군에 대한 해설부터 청취했다.
삼국시대 삼국과 함께 병존했던 가야제국(伽耶諸國)! 국가의 체제와 제도 그리고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졌던 가야제국(伽耶諸國) 가운데 안라국(安羅國)은 김해의 가락국(駕洛國), 고령의 가라국(伽羅國)과 함께 유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삼한시기에는 안야국(安邪國)이 4세기 이후 어느 시기에 안라국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강의 남쪽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남지역에는 마한이,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는 진한이, 서남부지역에는 변한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斯盧國)을 비롯한 12개국, 변한에는 구야국과 안야국을 비롯한 12개국이 있었다.
안라국의 형성 시기는 이웃 나라인 창원의 ‘골포국’ 사천의 ‘사물국’ 고성의 ‘고사포국’ 칠원의 ‘칠포국’ 등 포상팔국과의 전쟁과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과정을 잘 극복하면서 정치적 발전을 이루었다. 안라국 전성기 때의 권역은 불꽃무늬토기의 분포지역으로 보아 당시 안라국의 영역은 함안을 중심에 두고 서쪽의 진주 일부지역, 북동쪽의 창원 일부지역, 서북쪽의 의령 일부지역, 남동쪽으로는 마산의 진동지역 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권역이 멸망까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