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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29) – 하재효

6. 최치원 선생의 해인사(晩年) 생활
(1) A.D 898년(42세) :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를 짓다. 가족과 함께 가야산으로 가다. 해인사에서 만년을 보낼 심경을 엿볼 수 있는 시 한수를 소개한다.

저 중아 산이 좋다 하지 말라
/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뒷날에 내 발자취 두고 보라 / 한 번 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2) A.D 900년(44세) :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선벽기>를 짓다.
(3) A.D 901년(45세~) : <석순응전.석이정전>을 짓다. (4) A.D 904년(48세) : <법장화상전> 10권을 짓다. (5) A.D 908년(52세) :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짓다.

7. 최치원 선생의 타계(신선)한 연대
(1) A.D 909년(53세~) : 이후의 행적이 묘연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 합천군 고적 독서당에 “세상에 전하기를 최치원은 가야산에 숨어 살았는데, 어느날 아침 일찍 일어나 문을 나가 관과 짚신을 수풀 사이에 남겨두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해인사의 스님들이 그날을 기려 영정을 독서당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 고 적고 있다.

8. 최치원 선생의 해인사에 남긴 흔적
가야산은 합천 야로현 북쪽 30리에 있는데 선생이 일찍 가족을 데리고 이 곳에 숨어 살았으므로 지금 ‘치원촌’이 있다. (후인들이 그의 이름을 공경하여 고쳐 ‘치인촌’ 이라고 부른다.)
[해인사는 신라의 고찰로서 팔만대장경이 있다. 남쪽의 바위 절벽은 전설에 ‘신라 최학사가 암거하였다.’ 한다. 천석 사이에 홍류동,취적봉, 광풍뢰, 음풍대, 완재암, 분옥폭, 낙화담, 첩석대, 회선암이 있고 동구로 나오면 무릉교와 칠성대가 있는데 모두 돌에 ‘학사’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학사대’는 해인사 서쪽에 있으며 백 자나 되는 늙은 잣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삼장 남짓하다. 그것을 고운이 손수 심었으므로 대(臺)를 짓고 ‘학사대’라 이름한 것인데 대는 아직도 우뚝 서 있다. ‘농산정’은 홍류동에 있는데 고운의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의 시가 있기 때문에 ‘농산정’이라 한 것이다. ‘월류봉’은 가야산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나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온 곳으로 봉우리 밑에 청량사가 있는데 고운이 노닐던 곳이다. ‘무릉십이곡(武陵十二曲)’은 가야산 입구인데 무릉교로부터 치원리에 이르는 십여리에 흰 돌이 깔린 맑은 내가 붉은 바위의 낭떠러지와 푸른 절벽을 뚫고 나가 참으로 절경이다. 고운이 굽이 굽이 글을 써서 좌우의 봉우리나 구렁에 전부 이름을 써 놓았다.] < 미수(眉叟) 가야산기략에서 인용함 >

*필자의 건의 사항_농산정에서 소리길 따라 200여m 오르면 고운이 노닐던 청량사로 오간 길이 있는데(지금은 숲이 우거져 흔적을 분간키 어려움) 그 길을 다시 소통하여 ‘고운길’로 이름하였으면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