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 주세붕(1)
이성동
논설위원
군내 역사인물 탐구 시리즈(5)
합천을 선비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연유는 앞장에서 이미 피력(披瀝)하였거니와 합천에는 앞서 소개한 선비들 외에도 우리나라의 정치와 종교 및 사상사(思想史)에 큰 업적을 남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많다. 합천의 인물 탐구 시리즈 5, 이번 호에서는 이 땅에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적인 치국이념과 민본사상적(民本思想的) 교학이념(敎學理念)인 성리학(性理學)을 도입한 안향(安珦)에 대한 존현덕업(尊賢德業)과 학문의 진작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을 창시(創始)하여 조선의 교육입국(敎育立國)과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케 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에 대해서 고찰해보는 장을 마련해보았다.
주세붕은 합천 율곡(栗谷)면 문림리(文林里)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 마을 이름은 ‘민갓’ 또는 ‘문갓’이었는데 어느 날 중종이 주세붕에게 출생지를 묻자 주세붕이 ‘민갓’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중종이 ‘선비가 숲같이 많이 나라는 뜻으로 문림(文林)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는 본관을 경북 상주로 하는 주씨(周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씨(周氏)는 원래 중국 성씨로 고대 중국 헌원씨(軒轅氏)의 후예인 주(周)나라 난왕의 후손으로 주(周)나라가 망하자 주(周)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786년(신라 원성왕 2년) 시조 주이(周頤)가 상주 총관으로 재임(在任)한 후 그곳에 정착하면서 귀화한 것이 우리나라 주씨(周氏)의 시원(始原)이 되었다고 한다.
주씨의 후손들이 산간벽지 합천에 정착하게 된 것은 도은(陶隱) 주유(周瑜: 1347~1427)로부터 비롯되었다. 1367년(공민왕 16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오늘날 국립대학격인 국자감(國子監)에 근무하면서 유학(儒學) 진흥에 힘썼다. 이때 야은(冶隱) 길재(吉再), 상촌(桑村) 김자수(金子粹)와 함께 국자감에서 일했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그는 부인 청주 한씨 외조부 이계령(李桂齡)이 살고 있는 이곳 합천으로 들어왔다. 상주 주씨 집안은 고려 광종 때 지주사를 역임한 주세봉(周世封)으로부터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분은 우리나라 사액서원(賜額書院)의 효시(嚆矢)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운 신재 주세붕(1495~1554)이다. 주세붕이 살았던 시대는 연산군과 중종, 명종대의 4대 사화가 일어났던 정국(政局)이 매우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울 때였다.
어두운 밤바다에 필요한 것이 길을 안내해 줄 등대이듯, 민생의 삶의 방향과 국가명운의 지평을 설정해 줄 등대 같은 인물이 필요했던 시대이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목적으로 예치(禮治)와 덕치(德治)를 주장하며 민생안정과 교화에 힘썼다. 이러한 민생교화책의 하나로 서원을 이 땅에 처음으로 설립한 사람이 주세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