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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신화를 지역에서 다시 한번 이루고 싶은 해외 자유총연맹 연합회 이광술 회장은 누구인가

당시 대한민국의 지독한 가난이 싫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대륙의 광활함을 체험하며 성공을 꿈꾸었던 이광술 회장. 하지만 엄청난 문화차이로 인해 험난한 시련이 그의 앞에 놓였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주경야독의 정신으로 극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성공신화를 만들어가던 중, 뜻하지 않은 계기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면서 백인주류의 미국사회에서 한인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해외 동포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봉사하며 희생하는 삶을 택하게 된다.
그런 그가 이제는 여생을 고향인 합천을 위해 헌신하고자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마음가짐으로 돌아오고자 한다고 하니 이에 대해 얘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참고로 지면의 할애를 위하여 경어체를 사용하지 않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 자신의 소개를 간단하게 한다면?
▲ 1948년 12월 5일(호적상 1947년생) 합천읍 계림리 상보림동에서 부친 이종형, 모친 정행자 사이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합천초(50회)·합천중(19회)·합천종고(1968졸)를 졸업하였다. 군 제대 후, 김은희 씨와 결혼하고서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주 메트로폴리탄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무역업과 부동산사업 등을 병행하며 사업에 매진하였다.

― 오랜 시간 미국에 거주하였는데, 도미의 계기와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 군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형님은 의령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졸지에 어머니와 7남매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농협에 들어가 일했다. 열심히 발로 뛴 결과, 합천 단위농협 출자금조성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이에 영농부장으로 일할 수 있었다. 또한 묘산 단위농협에서는 참사(현재의 상무)로 일하면서 농협중앙회 합천군 농협 우수 간부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러다 군대에 있을 때, 논산훈련소 정봉욱 장군의 경호원을 하게 되었고, 그 분에게서 “한국은 현재 비전이 없다. 미국에 대한 비전을 꿈꿔라”는 메시지에 감동받아 젊은이로서의 성공을 위한 도전과 모험을 위해 1977년 합천예식장에서 결혼을 하자마자 미국행을 택하게 되었다.
한국과 미국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문화, 시스템, 생활환경, 음식, 사고방식 등 모든 것이 한국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시 한국엔 수세식 화장실도 없었을 정도였고, 미국의 기숙사에 있는 오븐을 보고서 빨래건조기로 착각하여 빨래를 말렸던 기억도 있다.
그 중에서 단연코 언어가 가장 힘들었다. 언어소통이 어려워 식당의 메뉴판을 못읽어 개밥이나 고양이밥을 먹은 적도 허다하다. 미국이 선진국이라고는 하나 식당에서 애완동물의 밥을 팔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말이다. 경제적인 부분도 힘들어져 공부를 하면서 줄곧 접시 닦기 등의 아르바이트는 계속 했어야만 했다.

―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방법과 노력을 했는지?
▲ 나보다 10~20년 먼저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자문을 받았다. 그 분들은 나에게 “이 사람들(미국인)이 잠잘 때, 잠을 안 자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잠을 4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다. 한국인들의 근면성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렇게 해서 대개 한국인들은 5년 안에 집을 마련하지만 미국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집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며 한국인임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 미국에서 어떠한 사회활동의 경험이 있는지?
▲ 동포들 위주로 많이 생각했다. 동포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미국 이주초기, 1980년대 당시 학생신분으로 한인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하루는 밤에 전화가 왔다. 한국여자가 감옥에 있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영주권 문제로 강제추방당할 상황이었는데, 너무 억울하다 싶어 그때 보석금이 만불 정도의 고액이었지만 돈을 모아 꺼내주었다. 그렇게 그 한국여인을 도와주기위해 병원과 법정 등을 다니며,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부인과 함께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면서 동포사회에 봉사하다 보니 어느덧 40여년이 가까워져 있었다.
1992년부터 약 25년간 미주 한인 총연합회 부회장을 하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다. 내가 후원회장을 맡은 마사 최(Martha Choe)는 1991년 시애틀 시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때까지 미국 내 대도시에서 시의원에 당선된 사람은 마사 최가 처음이었다. 당선 이후, 마사 최는 한인회의 권익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1992년 워싱턴 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1994년에는 한국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신호범(Paull Shin)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아 한국인의 미국정계로의 진출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은 큰 보람이다.

― 혹시 내년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군수후보로 출마하실 의향은?
▲ 페더럴 웨이(Federal Way, 미국 워싱턴주 킹카운티에 있는 도시) 라고 시애틀의 위성도시 격인 도시가 있다. 이 곳은 별 볼일 없는 도시였는데,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 15년 정도 이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하니 지금은 인구 10만 정도의 부자동네가 되었다. 페더럴 웨이 경찰서장 자문위원장, 상공회의소 이사, 교육청 자문위원, 시의원 캠페인 본부장, 타운발전 위원 등으로 활약하며 노력한 것을 인정받아 2011년에 아시아인 언론연합회에서 수여하는 아시아 개척자상을 수상하였고, 킹카운티 군수가 수여하는 사회봉사상을 수상하였던 것은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합천을 위해 일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당장 출마결정을 하기보다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앞선다. 그동안 하지 못했었던 고향 분들과의 소통을 많이 가져야하며 고향에 대한 관심의 폭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군수에 출마하고자 한다면 군민들의 여론에 신중히 귀 기울여서 연말 쯤에 입장표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여전히 선거와 관련해서는 돈선거란 말이 등장한다. 이에 대한 견해는?
▲ 최근 실망스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합천군수에 출마한다고 소문이 있던데 돈은 많이 있느냐? 하는 반문을 들었다. 한국의 선거제도는 아직 돈을 써야 된다고 한다. 내가 만약 군수선거에 나온다면 비록 낙선을 한다할지라도 한푼도 안 쓰겠다. 차라리 그 돈으로 지역에 봉사센터를 짓거나 지역발전을 위해 기부를 하겠다.
미국의 선거는 후원금을 모아서 한다. 만약 150만 시민이 있으면, 1인당 얼마를 모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 후원금의 액수가 곧 그 후보에 대한 지지율로 표출된다. 한국은 그 반대라고 하니 안타까운 심정이다. 돈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보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 고향에 오셔서 지역사회를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은?
▲ 합천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은 영재교육센터에 관심이 많다. 외지 학생들이 합천에 올 수 있는, 이것을 통해 고향에 인구증가를 만드는 계기로 만들고 싶다.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시애틀에는 마이크로소프트사, 아마존, 스타벅스 등 유수의 기업본사가 있다. 대기업 협력업체나 R&D 연구업체 등을 유치하여 지역경기 활성화에 일조하고 싶다.
한편 (가칭)합천군발전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이나 동남아 등과의 다양한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우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다.
다만 이러한 포부나 계획은 군수출마와 무관하게 합천을 위해 여생을 바칠 각오로 일하고 싶은 생각이다.
/서정한 편집국장, 차성민 기자